[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 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3)
돈암서원, 세계문화유산이 되기까지의 여정[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 인‧의‧예‧지 ‘선비의 혼’을 찾아서(3)
“돈암서원의 가치, 세계가 인정하다”
■ 돈암서원이 ‘한국의 서원’에 포함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에는 수많은 분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겠지요.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요약된 설명 부탁드립니다.
논산시를 비롯해 많은 돈암서원 관계자 분들이 돈암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 왔습니다. 우선, 역사·문화·사상·교육·건축·의례 등 여러 측면에서 가치가 큰 돈암서원을 역사적 가치가 살아있는 서원으로 보존하기 위해 보수 및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지요. 또한, 전통문화유산이 좀 더 국민에게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초등학생부터 일반인까지 참여하는 조선시대 과거제를 재현한 ‘논산향시’ 행사를 비롯하여 명사 강연, 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서원에서 진행했으며, 돈암서원 인근에 한옥마을을 조성하는 등 시민과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서원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왔습니다. 2011년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했는데, 당초 돈암서원은 ‘한국의 서원’ 등재 대상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논산시와 돈암서원은 ‘돈암서원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설파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돈암서원은 한국 유학의 양대 흐름 가운데 기호유학의 정통을 계승하며, 기존에 선정된 서원이 주로 영남유교 중심이므로 동서 화합을 위해서도 돈암서원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이러한 적극적 노력으로 최종 9개 연속유산 가운데 하나로 돈암서원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서원’에는 돈암서원 외에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도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정읍 무성서원이 포함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세계가 인정한 ‘돈암서원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2011년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잠정목록에 ‘한국의 서원’이 이름을 올리고, 2015년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는데, “독창성과 연속유산으로서 9개 서원의 연계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돈암서원은 한 차례 옮겨지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지요. 이에 세계유산위원회의 등재 거부 시 향후 등재 자체가 불가능해지므로 9개 서원 관계자(기관)는 합의를 통해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했습니다. 이후, 지적사항을 보완해 2018년 다시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습니다. 돈암서원 등 ‘한국의 서원’이 지닌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의를 부각해 어필했습니다. 돈암서원은 홍수 등 자연재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옮겨지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서원 이건이 “돈암서원의 진정성을 해쳤다”는 평가가 부적절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끊임없이 돈암서원의 진정성을 강조한 결과 2018년 재신청 당시, 이코모스(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중국 대표는 “서원으로 불리는 성리학 교육기관이 중국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한국의 서원’ 역시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동아시아의 유교문화 보급과 지역화에 이바지한 중요한 유산이며,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된 한국의 독자적인 서원건축 형식을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에서 성리학을 꽃피우게 했다.”라고 발언하며 ‘한국의 서원’이 갖는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였습니다. 돈암서원 등 ‘한국의 서원’은 유네스코 등재기준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 중 세 번째 항목인 ‘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관하여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구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의 서원’은 조선 사회 전반에 널리 보편화된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자 성리학의 지역전파에 이바지하였고, 건축적으로도 정형성을 갖추었음을 인정받은 것이지요. 이후, 돈암서원은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2019년 9월 17일, 돈암서원에서 고유제를 개최해 많은 시민과 함께 돈암서원의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했으며, 9월 29일에는 논산시민운동장에서 ‘동고동락 논산시민음악회’를 개최해 돈암서원의 세계유산 등재를 시민과 함께 축하했습니다.
■ 한국 예학의 산실 돈암서원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돈암서원(遯巖書院)은 1634년에 건립되었고, 주 제향 인물은 사계 김장생 선생(1548~1631)입니다. 1660년 현종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며 사액서원이 됐으며,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입니다. 돈암서원은 사계 선생이 성리학의 실천이론인 예학을 한국적으로 완성한 유서깊은 서원으로, 소장 문집과 예서 책판간행을 통해 호서지역 사림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당시 돈암서원에 출입했던 유생들은 호서지역을 비롯해 전북 일대에까지 고르게 분포했고, 이들은 강론과 토론에 열정적이었고 학문과 사상을 공유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돈암서원은 매우 훌륭한 건축물들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보물 제1569호인 응도당(凝道堂)은 돈암서원 건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되었으며, 다른 서원 건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 돈암서원이 왜 이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진정성은 무엇인지?
돈암서원은 기호유학의 수선지원(首善之院)으로서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 서원이 세워졌던 곳은 1634년(인조12) 현재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논산시 연산면 외성리 외성산 자락 숲마을이었습니다. ‘범내(虎溪)의 언덕’으로 불리는 현재의 자리인 ‘연산면 임리 74번지 일원’으로 옮겨온 것은 1880년(고종17)이었죠. 약 250년을 애초의 자리에 있었고, 한 세기 반에 가까운 동안을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원 이건(移建)을 기점으로 옛 돈암서원과 현재 돈암서원의 건물과 배치는 다를 수밖에 없고 원래의 지형, 주변 환경도 다릅니다. 게다가 응도당은 “조선 후기 강당 건축의 전형으로 주자학적 이념을 서원 건축에 구현시켰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응도당이 옛 돈암서원 터에 그대로 남아있다가, 무려 91년이 지난 1971년에야 현재 돈암서원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이에 강학 공간의 정중앙에 위치하지 못하고 한쪽 측면으로 비켜나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돈암서원 이건은 자연환경의 위협에 맞닥뜨린 호서의 사림이 건물의 규모와 배치는 예제 원칙을 지키는 한편, 서원은 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이 이룬 예학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당시 어지러운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실천적 행동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원 등재에 따른 유네스코의 기준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원은 “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독특한 역사 전통과 성리학의 가치를 나타낸다. 향촌 지식인들은 이 유산을 통해 성리학 교육을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한 교육 체계와 건축물을 창조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성리학이 전파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렇다. 자연재해의 벼랑에 몰린 돈암서원의 정신과 건축물을 살리려는 호서 사림들의 진정정이 무시된다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증명하고 지역 주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에게 그 가치를 활용할 수 있는 문화유산은 앞으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돈암서원의 완전성과 진정성에 대한 답은 다른 곳이 아니라 서원이 간직해 온 문적 속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돈암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보존과 활용이라는 앞으로의 과제도 돈암서원 문서의 기초자료 정리가 출발점이 되어야 하겠죠. 문화 콘텐츠는 무(無)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유(有)에서 재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암서원을 거쳐 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 문집, 기문, 목판 등의 기록유산에 대한 학문적 정리와 데이터베이스화, 그에 기반한 유형·무형의 유산을 보존 전승하는 현대적 활용 사업에 온 힘을 다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영주 편집장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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