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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의 남산재와 손필규의 항일운동
기사입력  2019/03/12 [16:05]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남산리 출생 손필규 선생과, 남창재 인근의 비석

 

은진면 남산3리는, 은진면 탑정로가 끝나가는 채운면과의 경계이다. 말이 은진면이지, 동네사람들은 채운국민학교를 나왔고 식당도 채운면사무소쪽을 이용한다. 논산 시내 기준으로 볼 때 대개는 연무대나 강경대로로 빠지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접어들 일 없는, 숨겨진 동네이다. 

 

남산재는, 남씨 아닌 손씨 사당

 

남산리는 손씨가 8할 정도로 손씨 집성촌였다. 이 곳에도 외지인이 들어와 현재는 반반 정도 비율이다. 남산리에서 손씨 시재를 지내는 곳은 남창재(南昌齋)이다. 이 재실 남창재는, 빈 집이 아니라 후손이 직접 들어와 사는 생가(生家)라는 점이 이채로운데, 남자후손이 아니라 여자후손이라는 점도 그러하다.  

순국지사 손필규 묘가 있는 남산리는 1000여 소나무가 손씨 선산을 엄호하고 있다. 애국가에 있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서울 남산이 아니다. 은진면 남산은, 예전에 남(南) 씨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생겨난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남씨가 아닌, 손씨 집성촌이다.

손씨 시재는 이제 1년에 한번만 지낸다. 시재를 지내는 재실인 남창재를 찾아가 이것저것 물으니, “정확한 것은 동네에서 제일 많이 아는 손광식 할아버지니 찾아 뵙고 직접 들으라”고 한다. 

“여기 남산 전체가 우리 중종땅인데 우리 큰할아버지가 일부를 팔아먹었어요. 일제 때 공동 묘지가 필요했던 모양인데, 그때 한쪽 팔고, 그 후에 어디 조금 더 팔고... 남산에 우뚝 서 있는 순국지사 손필규 할아버지는 동학(東學)이라 불리던 천도교 접주(接主)였어요. 우리 징조할아버지와는 사촌간이었고....손필규 할아버지는 여기 있기보다 서울 왔다갔다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는데, 그때 징조할아버지가 22마지기를 팔아서 말하자면 헌금을 한 거지, 독립운동자금으로!”

한쪽 선조는 사리사욕으로, 한쪽 선조는 나라 위해 싸웠다는 얘기를 비롯하여 동네 이야기 한참 들은 연후, 손광석 옹 집을 나와서 남창재쪽으로 다시 향했다. 남창재 건물이 새삼스럽게 보인다. “저 재실이 200년이 넘은 집이여. 중간에 한번 보수했다는데, 나 태어나기 전이지.” 구전(口傳)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던 손광석 옹의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무심코 보았을 기와며 기둥들이다. 남창재 건물만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인근에 묘가 많지만 유달리 큰 비석은 두 개 서 있는데 그 중 하나에 적혀 있는 한자 손/필/규 이름 석자가 유독 크로즈업되어서 들어온다. 

비석 글씨나 구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우리는 논산의 자랑스러운 기록과 자료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순국지사(殉國志士) 손필규(孫弼奎) 이야기는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1938.5.1.일자 부산일보, 독립운동사(3권, 8권), 독립유공자공훈록(2~3권), 대한충의효열록, 천도교정신사(천도교의 운동약사) 등에 기록되어 있는 이들 기록을 종합하여 당시 30%를 점하던 동학의 교세와 그네들이 추구하던 바를 재구성해보자. 

 

남산리 출생 손필규 

일제는 애국지사들을 요시찰명부에 올려 인적사항과 인상(人相), 주의(主意), 요점(要點) 등 상세히 기록하고 감시해 왔다

 

순국지사(殉國志士) 손필규(孫弼奎) 이야기 

 

3월 10일 옥녀봉에서 최초의 만세 사건 이후 이틀 후인  12일 논산읍에서 천도교인 천 여명이 독립선언서 배포 등 시위를 하였다. 손필규 외 2명이 체포되자 당일 강경 경찰서 앞에서 시민, 학생, 100여 명이 손필규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논산의 시위를 이끈 손필규는 누구인가?

손필규의 호는 반암(盤菴)이며, 1870년 7월 20일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손필규는 어려서부터 한문에 능통하였고, 성년에 이르러 국운이 기울어져 왜놈이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국운을 회복하고 백성을 구제하기로 결심하였다.

 1904년 손병희, 권병덕, 권동진, 오세창 등과 제휴하여 각처를 다니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다. 1912년에는 서울의 봉황각(鳳凰閣)에서 49일 동안 국운이 회복되기를 기도 드렸고, 1918년 손병희 산하에서 교령(敎領)의 책임을 맡아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 후 손필규는 천도교(天道敎) 은진 교구장(恩津 敎區長)이 된 데 이어 지방순회 위원 겸 논산군 교구장이 되어 논산, 대전, 공주, 부여, 임천, 청양, 고산, 진산, 금산, 진안, 용안, 함열, 이리, 옥구, 군산 등지에 관내교인들을 밀파(密派)하여 독립 운동을 고취시켰다.

 1919년 3월 11일 논산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손필규는 김태오와 함께 논산읍내에 거주하던 천도교 교인 민영순(閔泳淳)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고 3월 12일 논산읍내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김태오(金泰午 ; 다른이름 김태호 金泰昊), 이백순 (李伯純), 이근옥(李根玉) 등과 함께 미리 태극기를 그려 두었다.

3월 12일 오후 3시반경, 손필규는 동지들과 같이 논산읍민과 학생 1백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논산읍민들이 가세하여 시위 군중은 1천여명에 이르렀다.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일제는 무역으로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서 만세시위 대열은 미친 듯이 날뛰는 왜병의 총칼날에 무참하게 짓밟히게 되었다. 이때 염상오(廉象五)는 일헌병의 발포로 순사(殉死)하였다.

이날 밤 손필규는 김태오, 이백순 등과 함께 태극기를 돌리며 독립만세 시위를 계속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밤 일경은 시위운동 주동자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손필규는 이때 체포되어 공주 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공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면서도 밖에 있는 동지들과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협조하였다. 왜헌병이 마음을 돌리면 관직을 주겠다고 달랬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옥고를 치루고 나온 손필규는 1938년 천도교인으로서 교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의 지령으로 실시된 세칭 “무인년 기도사건(戊寅年 祈禱事件)”으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무인년 기도사건은 천도교 교주 춘암이 전국 각처의 두목들에게 “무궁한 내 조화(造化)로 개같은 왜적놈을 일야간(一夜間)에 멸하고서 전지 무궁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라고 조석식고(朝夕食告)에 지성껏 기도하자는 멸왜기도 (滅倭祈禱)의 밀령을 내렸다. 우리나라 주권 획득운동이 극비리에 진행되는 도중에 신천(信川) 경찰서에 제보되어 황해도 연원대표 홍순의(洪順義)와 관내 교인을 검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다수 교인들이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손필규는 일경에 검거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왜경에게 취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손필규는 의연한 태도로 “강탈당한 내 나라의 주권을 찾으려는 일이 무슨 죄란 말인가!” 하면서 “춘암상사(春菴上師)는 나의 스승인데 내가 스승님께 누가 미치는 언동을 할 수 있겠는가! 설사 춘암상사의 지시로 내가 왜멸(倭滅)기도를 하였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선생님의 지시로 이 일을 했다고 할 것인가?” 하고 항변하면서 시종일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왜경의 고문과 약형이 사정없이 가해져서 69세 노구(老軀)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석방되어 큰아들 손우진(孫愚鎭)이 등에 업고 집으로 왔을 때는 혹독한 고문으로 몸은 부어올라 옷을 벗기지 못하고 가위로 짤라내어야만 했다. 

결국 손필규는 고문당한 여독으로 별세하였고 유족으로는 손자 손제원 씨가 은진면 남산리 579번지에 살고 있다.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기록·정리]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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