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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6)] 두계장터 만세운동
꺼진불 되살리고 장렬 산화한 배승지 자제 배/영/직
기사입력  2019/03/20 [18:52]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6)] 두계장터 만세운동

꺼진불 되살리고 장렬 산화한 배승지 자제 배/영/직

 

논산 3·1운동100주년기념행사는 끝났다. 계룡은 4·1독립만세운동을 준비중이다. 논산은 무대 위의 연극이 하이라이트고, 계룡은 풍물단을 앞세운 20분간의 거리행진이 파노라마다. 용남고를 비롯한 5개교에서 1800명이 운집해서, 1919년 당시 두계장터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천여 명의 함성을 되살린다. 

논산강경은 7차례에 걸친 만세사건으로 광역권이지만, 계룡은 두계장터 딱 한 곳뿐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볼 때 1919년 한번 일어났던 불씨가 1924년에 되살아난다. 아니, 되살린다. 1919년 당시 34세인 배영직은 태형 등 모진 고문 후 6개월간 감방생활을 하고 나온다. 5년 후 그는 또다시 만세운동의 한복판에 선다. 왜경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 민족의 혼불이 이렇게 꺼져갈 수 없다며 만세정신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저잣거리로 나섰다. 또다시 수감이 되고, 군산교도소에서는 사경에 이른 거구의 할아버지를 들것에 떼매여 나왔다고, 그러나 이틀 후에는 돌아가셨다고 배기성 장손(92세)이 증언한다. 

이웃도 증언하였다. 1989년 3월 29일, 당시 80세였던 농소리 주민의 증언에도 눈 기울여 보자. 

 

[입증] 논산군 두마면 입암리 341번지 망(亡) 배영직

 

위 어른은 본인 소년시 이웃마을에 사시는 어른으로서 1919년 이후 1924년경까지 주로 두마면 시장일에 다수인이 운집하는 장소에서 잃은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요지 역설도 여러 번 하시고 독립만세를 주창하시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가는 관경(觀景)을 당시 여러 사람들이 보았으나, 지금은 다들 사망하고 유일하게 본인만이 남어 있어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1989년 3월 29일 논산군 두마면 농소리 687 박성식 1910년 1월 1일(당 80세) 주민등록번호 100101-*******) 

        

문화원이 들려주는 일제하의 일대기

 

배영직 열사 독립운동 관련자료 중 비교적 쉽게 풀어놓은 것은 논산시문화원 『논산지역 독립운동사(일제하의 논산)』이다. 한국독립사(하) 158, 독립유공자공훈록(2) 167, 논산군지 127, 783. 동아일보 1923.03.10.를 참조하여 재구성해놓은 기록을 펼쳐본다. 

 

배영직(裵英直)은 논산군 두마면 임암리 341번지 출신으로 두마 장날 일체에 항거, 대한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한 항일투사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라온 배영직은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정의로운 일에는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라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잘 따랐다.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일제는 우리나라의 내정까지도 간섭해 오다가 1910년에는 강제로 한일합방 조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주권마저 강탈하니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여러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압박은 날로 심해져가고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이 뒤얽혀 배영직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비밀리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힘을 뭉쳐서 일제에 항거하여 우리의 주권을 찾아야 한다” 하며 역설하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 있었다.

그 때 거국적인 3·1운동이 태동하게 되니 배일감정이 절정에 달한 우리 민족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배영직은 이 시기를 절호의 기회로 삼고 주위에 있는 청년들을 모아놓고 인원 동원이 용이한 두마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비밀리에 계획을 세우고 거사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마장날 배영직은 군중들 앞에 나서서 국권회복의 중요성을 역설한 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수백명의 장꾼들이 합세하여 두마장 일대는 만세소리로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 동안 배영직은 부친인 배대식(裵大植)과 함께 1910년부터 1923년까지 국권회복책의 일환으로 농촌자력갱생운동(農村自力更生運動)을 계속하여 왔다. 부근에 있는 빈민(貧民)들을 찾아다니며 수십 석의 양곡과 수백원의 금품을 매년 정기적으로 나누어 주면서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여 지역 주민들의 추앙을 받아왔기에, 배영직이 앞장서는 만세 시위운동에는 구름처럼 몰려와 합세하였다.

그러나 배영직은 1924년 두마장날 또 다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었다. 워낙이 기골이 장대한지라 왜경들은 마음대로 다루지를 못하고 철사줄로 망을 치다시피하여 묶어서 끌고갔다. 군산 형무소에 이송되어 2년간 형 복역을 하여야 했다. 왜경의 혹독한 고문은 매일 계속되어 견디기 어려웠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자, 배영직이 살던 집마저 불살라 버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왜경이 치료하려 하자 그것마저 거절하고 끝내 치료를 받지 않고 저항하니 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쇠약해졌다.

1926년 10월 사경(死境)에 이르러 출옥하여 들것으로 집으로 떼며와 보니 상처에서는 괴자리들이 들끓고 있어 참으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배영직은 옥고로 출옥한 지 3일 만에 순사(殉死)하였다.

 

이상의 기록에 대하여, 배기성 장손은 2일 만에 돌아가신 것으로 들었다고 증언한다. 할머니는 세간을 다 놔둔 채 핏덩어리만 들쳐업고서 농소리 고개를 넘다 보니, 아래동네에서 치솟는 연기가 보이더란다. 지금도 배열사 생가터는 공터이다. 농소리 고개 넘어 개태사쪽으로 건너가 하룻밤 남의 집 허청에서 신세지고 큰 집이 있는 취암동 수눔바위 큰 집을 찾아갔다. 이렇게 남의 집 허청채에서 시작된 곤궁(困窮)한 삶은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아침 거르고 등교하여 운동장에 쓰러지면 친구들이 일으켜 세웠고, 이런 그와 할머니는 서로 붙잡고 울어야 했다. 

학교짓는 데 다니며 목수로 일한 아버지는 가난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만주 진용으로 건너가 살기도 하였다. 와중에도 배기성 어린이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덕인지, 공직생활로 접어든다.논산군에서는 내무과장을 거쳐 부여 부군수로 정년퇴직하였고, 지금은 논산 내동 단독주택에서 독거중이다. 몸이 불편하여 인터뷰도 거부하고 두마장터 만세행사에도 불참하려 했지만, 시청과 광복회의 케어로 논산행사에 이어 계룡행사에도 참여하겠다 승낙한 상황이다. 

 

철로 훼손도 획책한 행동파

 

다시 할아버지 배영직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배옹의 증언에 의하면 증조할아버지는 배승지로 불렸다고 한다. 승지(承旨)란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비서실장쯤이다. 그러니 배열사는 흑수저 아닌 금수저이다. 가만 있으면 아쉬울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수저를 가차 없이 집어 던졌다. 점잔은 양반집 자제도 아니었고, 평화로운 민족자결주의자, 만세운동가도 아니었다. 체격이 장대하여 웬만한 왜경을 뿌리칠 정도로 단단했고, 철도 파괴 등을 획책한 테러리스트였다. 국가보훈처 배영직열사 공훈록을 보면 그의 과격성 일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1919년 충남 논산군 두마면(豆磨面)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지역의 유지이자 자산가인 부친 배대식(裵大植)과 함께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쳐왔고 인근의 빈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4월 1일 오후 4시경 향리인 두마면 두계(豆溪)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날 오후 6시경 그는 일본인 순사를 뿌리치고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격동된 장꾼들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다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후 7시경에 이르러서는 시위군중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대의 일부는 일제침략과 수탈의 교량 역할을 하던 철도선로의 파괴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공무집행 방해 등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4년에도 만세시위를 다시 하다가 체포되어 군산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지 3일 만에 고문 여독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순사를 완력으로 제압하다 기물파손죄까지

 

 

형사재판서를 보면 그의 과격성이 리얼하다. 다음은 1919년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원의 기록인데, 원본은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번역은 김철규 계룡시광복회 사무국장이 한 것이다. 

대정(大正) 8년 형공 제97호, 판결,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입암리 피고, 농, 배영직, 39년 / 우 공무집행방해 혐의 및 보안법 위범 피고사건으로 당 재판소에서 판결함은 우와 여함.

[주문]  피고는 징역 6월에 처함. 압수증거물건은 차출인에게 송부한다.

[사실 및 이유]

피고는 

제1) 대정 8년 4월 1일 오후 6시경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두계시장에서 폭발하는 조선독립만세 소요현장에서 군중을 규합하여 선동하여 불심검문하는 당시 취재에 종사 중 순사 고야달(高野達)一와 동사건관계 혐의자로 인정, 동지 주재소 동행을 구하는 도중 多衆(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차례 폭언을 하고, 같이 가자는데 따르지 않고 수갑을 채우라는 동 순사가 힘이 부족하여 이를 조력하는 순사 김자봉(?) 길의 머리, 혹은 배를 번갈아가며 강타하는 등 폭행을 하게 되어 高野순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승을 채우려는 순간, 동 순사가 입고 있는 정복 상하 한 벌과 포승 한 가닥을 파손하여 당 순사에게 저항하고

제2) 피고는 무엄하게도 당 순사에게 저항한 끝에 그 주변에 운집한 100여명의 군중을 향하여 지금부터 자신이 수창자가 될 터이니 “조선독립만세”를 삼창 외치자 하고, 주변사람들과 다 같이 만세를 높이 불러 선동한 후 자기 스스로 독립만세를 연거푸 외치게 하였으므로 법률에 빌여 볼 때에 첫째는 공무집행방해죄로 형법 제95조 제1항 기물파손죄와 동법 제161조에 해당하고, 기물파손과 공무집행방해죄외 ??으로 결과 관계로 인하여 동 제54조 제1항 제10조에 의하여 범정(犯情)이 주는 공무집행방해의 형에 해당, 처단하고, 

제2외 처벌은 보안법 제7조에 해당하여 징역형을 선택하여 병합죄에 부치어 형법 제45조, 제47조를 적용하여 其 최초 공무방해죄에 의하여 징역 6월에 처하는 것이 상당 인정되어 압수의 증거물건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202조에 의하여 차(?)출인에게 송달하기로 하고 주문과 같이 판결함. 

검사 사무취급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매림항차랑 관여

대정8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 

조선총독부 판사 중촌요삼랑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권녕?(權寧?)

 

배영직열사의 장손 배기성옹(좌)와 김철규 광복회사무국장

 

아산은 태형 100명 명단을 찾았다는데...

 

이상 번역 중 일부는 미흡하다. 일본한자까지는 몰라서 한계가 있다고 토로하는 김철규 광복회사무국장 겸 계룡학연구회장은, 그 동안 배영직 열사를 비롯한 항일 자료를 증언(證言)과 현장 답사로 집대성시켜 왔다. 

이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배영직 열사의 종손인 배기성 옹의 육성 인터뷰까지 녹화한 김철규 회장의 입담에 귀 기울여 보자. 

김회장은 조정래의 『아리랑』을 배경으로 깔면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1910~1918년 실시한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부터 시작된 3차에 걸친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생산한 양곡은, 대부분 일제에게 수탈당하여 일본 본토로 보냈다는 역사적 배경말이다. 조선총독부의 토지 수탈과 이에 항거한 배영직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이어지는 3대에 걸친 혹독한 시련의 삶이 클라이맥스라며 이야기를 펼쳐가는 김철규 회장은 1900년 당시의 역사 소환부터 시작한다. 

 

[농촌자력갱생운동의 배경]

 

일제는 한반도 침략의 가장 큰 목표는 국내의 부족한 쌀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당시 토지를 소유한 농민 95%가 문맹자였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지주인 양반토지는 그대로 두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토지, 즉 관토, 군토, 역토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통째로 집어삼킨다. 자작농 농토는 총독부 고시 기간을 짧게 하여서, 신고 누락자는 모두 몰수하여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분배하였다. 그 결과 전 국민의 80% 이상인 농민들이 하루 아침에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소작료는 70% 이상이나 되었다. 

소작농들은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연해주로 떠나야 했다. 북녘 동토에서의 나날은 극한 직업이었다. 마적과 중국인들의 소작료 인상, 일본군의 응징,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돌맹까지 들어올리는 칼바람...

 

[3대에 걸친 가문의 수난사] 

 

배영직 열사의 부친 배대식은 달성배씨로, 승지 벼슬의 권문세가였다. 그의 아들 배영직은 대한제국 융희2년(1908년)에 궁내부 주사였다. 다른 양반들처럼 적당하게 타협했더라면 3~4대에 이르는 형극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배승지와 그의 4째아들 배영직은 1914~1923년  농촌자력갱생운동을 전개하였다. 매년 수십 석의 양곡과 수백원(1원=약5만원)의 금품을 빈민들에게 지급하였다. 1919년 4월1일 두계장터 독립운동 주도로 6개월 징역형, 1924년 2차 만세운동 주도로 2년형 감옥생활 후 출소됐으나 모진 고문으로 순사하고 말았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라고 추앙하지만, 당시에 멸시와 경시의 대상이었던 배영직 죄인과 그의 가족들은 가난과 사회적인 질시로 뼈저린 고통을 받았다. 기미년 만세운동 직후 일제헌병은 입암리 자택을 들이닥쳤다. 어린 자녀를 비롯한 가족들은 황급히 뒷산길을 따라 농소리쪽으로 해서 도망쳐 나왔다.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논산 취암동 큰댁으로 걸어서 피난왔지만 왜경의 요시찰대상으로 정서적, 정신적인 고초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가친척들조차 도움을 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장손인 배기성 씨는 배고픔과 일경의 감시에 시달렸던 기억이 점철되어서, 기 한 번 제대로 못 피고 살았다고 술회한다.

이런 이야기를 가족 대신하여 들려주는 김회장이, 취암동 달성배씨 집안처럼 느껴질 즈음, 논산 소속이었던 두마면이 어느덧 계룡시이다. 계룡시가 주최하는 두계장터 4·1만세운동은 2014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6회째이다. 시 주최라고는 하지만 대회 주관은 대부분 광복회계룡시지회가 관장한다. 대전지방보훈청, 용남고, 계룡고, 계룡중, 두마초, 계룡시보훈단체협의회, 두마면주민자치위원회, 계룡학연구회가 후원하는 가운데 광복회가 선두 지휘하는 포진이다. 

팥거리에서의 행진 후 점심은 팥죽이다. 이성계가 신도안을 신도성으로 선정 후 궁궐신축을 위해 전국 장정들을 동원하였다. 고향땅 뒤로 한 채 부역온 민초(民草)들이 허기 달래고자 먹었다는 전설의 팥죽, 그래서 두계 팥거리! 아침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운동장에서 일어나 교실로 겨우겨우 들어가면 그래도 인천출신 김영신 선생님이 반겨주셨다. 

그렇게 성장한 독립운동가 후손 배기성 옹은 4·1행사날 어떤 심정으로 팥죽을 드실지 걱정 겸 궁금증이다.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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