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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봉동리 송병석 님 "지끈처럼 삶의 공배 이어준 사람들, 그리고 신명"
기사입력  2019/03/27 [13:25]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봉동리 송병석 님의 인생노트]

지끈처럼 삶의 공배 이어준 사람들, 그리고 신명

 

 

송병석

  • 1931년 10월 18일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서 태어남
  • 1942년 12 세, 부친 별세로 외가인, 연무읍 봉동 1리로 이사
  • 1946년 야학 15일(독학으로 1987년부터 일기 씀)
  • 1950년 20세, 육이오 발발, 8월에 군 입대
  • 1956년 26세, 신인순 님과 결혼(2남 4녀)
  • 1975년 45세, 부인과 사별 
  • 1978년 48세, 계섭섭 님과 재혼(1남)
  • 2004년~ 농악, 건강체조, 스포츠 댄스, 고전무용 강습
  • 2006년, 정읍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상쇠 개인특별상
  • 2015~2018년 봉동1리 노인회장/ 늘푸른대학 풍물강사
  • 2016년 논산시 공예품경진대회에서 ‘지끈 공예’ 장려상
  • 2017년 가을, 논산시 스포츠댄스 대회에서 장려상
  • 2018년 논산시합창대회에서 ‘봉동진료소팀’으로 2회 준우승

 

 

 노을에 핀 꽃-장밋빛 신나는 인생

 

올해 89세 송병석 어르신은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어린 시절, 남들이 학교 갈 나이부터 본인은 학교 문턱도 못가 본 채 고생을 밥 먹듯 하며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쓴 미국의 흑인 도슨이 생각났다. 그도 학교 근처도 못가 본 채 아홉 동생을 부모님과 함께 거두면서 일해야 했다. 일흔 번이나 직업을 바꾸며 살아 왔다는 사실이 눈물겹다. 그는 노년 들어 낚시나 하며 소일하다가, 98세에 인근 고등학교에서 실시한 성인교육에 참여하여 평생 소원이던 알파벳을 익히며 5년 공부를 했다.

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퍼지자 초등학교 교사이던 그로브먼 선생이 찾아와 101세에 책을 공동 저작했다. 그 책은 히트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로써 사람들에게 희망과 행복의 메시지를 남겼다.

송병석 어르신의 인생은 도슨을 능가한다. 야학 15일간의 학습으로 모음 자음을 꿰맞추며 독학하여 50대 중반인 1987 년부터 지금껏 일기를 쓰고 계신다. 부인이 돌아간 74세부터는 논산시 종합복지회관 프로그램 다섯 가지와 마을 보건진료소에서 실시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논산 감리교회에서 수요일 장구를 가르치며 봉사도 하셨다. 인생이 70부터라고 하더니 그분은 89세의 인생 오후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으며 꽃 피우고 산다. 

 

맨발의 나무꾼 소년

 

그는 1931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송주성 씨와 어머니 강추월 씨의 4남매 중 장남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학교 문턱에도 못 갔으니 ‘낫놓고 기억자도 모른’ 채 소작농인 부모님을 거들어야 했다. 나무를 해 오고 소에게 줄 꼴을 책임져야 했다. 12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친정인, 지금 어르신이 사는 연무대 봉동리로 옮겨왔지만 굶기를 밥먹듯했다. 어머니도 입 하나 덜기 위해 개가하고 14세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한다. 처음에야 심부름이나 하고 집안일이나 거들며 밥이나 얻어먹었다. 

15세 때 해방이 되었지만 그에게 밥이 더 생길 리도 만무했다. 17세부터 일 년에 세경으로 쌀 닷 말씩 받았다. 봉동리에서 십리 길이 넘는 화산을 지나서 나무를 해오는 일이 많았다. 지난 밤 집신을 삼아 놓아야 아침에 신고 갈 수 있는데 그 준비를 못한 날은 맨발로 뛰었다. 그 시절 미투리를 삼던 솜씨는 훗날 지승 공예에 취미를 붙이도록 연줄이 된다.

 

전쟁때 살아남은 포병 이등상사

 

 1950년 스무 살에 육이오 한국전쟁이 발발, 일단은 피난 보따리를 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군대 영장을 받는다. 1951 년은 논산에 훈련소가 없던 시절이었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둥 마는 둥 바로 중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금화전투, 철원 원통 인제의 산악지대에서 인민군과 싸웠다. 양구 전투 중에 발전기를 싣고 산 넘어 본부에 가다가 인민군의 습격으로 포탄을 맞았다. 자동차는 폭파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가 죽지 않고 제대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방에서 곡사포를 쏘는 포병이어서였을 것이다. 맨 앞에 섰던 보병은 총알받이였다. 그 상황에서 살아 남은자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그는 일등 중사 선임하사에서 이등상사로 6년 후 스물여섯 살 8월에 제대한다. 그때까지 글을 몰라 편지 한 장을 써보지 못하고 사진 한 장 간직한 것 없이 목숨만 부지한 채 고향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 덕에 지금은 참전 용사 연금을 받는 걸로 연줄은 이어진다.

 

 

 

장가 잘 들어 6남매 키웠건만

 

 1956년 8월에 제대하고 그해 12월에 혼인을 하였다. 마침 그 동네로 피난 왔던 신부감을 고모가 중신하여 결혼을 하였다. 스물여섯 살이었다. 장모와 처제와 함께 살았다. 어르신은 군대 가면서 논 1400평(7마지기)을 사 놓으신 바 있다. 그간 머슴 세경으로 받은 쌀을 불리고 늘려 일본인이 소유했던 논을 사들인 것이다. 그 시절엔 쌀은 현금과 같았다. 집도 쌀 가마니로 환산하여 거래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쌀을 장리로 주어 늘어난 쌀로 논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스무 살이었다. 

군대 간 사이에 외삼촌이 농사짓던 논을 돌려받았다. 아이들은 연년이 생기고 남의 일도 마다 않고 열심히 해댔다. 그 때는 너 나 없이 빈손으로 시작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로서는 든든했다. 스무 살 청년이 혼자 힘으로 논 일곱 마지기나 장만해 놓았으니 크나큰 살림 밑천이었다. 열심히 살자 살림이 불었다. 큰아들, 큰 딸, 작은 아들이 외지에서 일을 하거나 공부를 했다. 너무 힘껏 살은 탓일까, 고생하던 아내가 막내 세 살 때 드러눕게 되었다. 슬하에 딸 넷에 아들 둘, 육남매를 두고 아내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처복은 거기까지, 자식복은 줄줄이

 

삶이 올 스톱된 느낌으로 꼼짝 달싹할 수가 없었다. 마흔 다섯이었다. “중간 상처는 망처”라는 말도 있듯이 아이 여섯과 혼자서는 삶을 도저히 꾸릴 수가 없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던 그는 술 힘으로 삶을 연명했다. 주변에서 중신을 섰다. 중신아비가, 아이는 셋이라고 말했다. 합의가 되어 누님댁에 함께 인사를 갔다. 누님은 고마운 마음에 아이들 많은 집에 와 주겠다니 고맙다고 인사했다. 여자가 다시 물었다. “아이가 몇이라고요?” “아들 둘에 딸 넷입니다.”

혼사는 바로 틀어졌다. 거짓말을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당시 애들 셋이 집을 나가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거짓말을 시켰으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그러나 인연이 되려니까 그들은 다시 합칠 수 있었다. 아홉 살 아래며 딸린 자식도 없어 어르신은 그야말로 복덩이를 만난 것이다.

여자는 오자마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원래 그분은 아이를 못 낳아 결혼생활이 틀어졌던 분이다. 새 삶이 왔다. 살림도 늘어갔다. 아이들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전처 소생 여섯을 다 결혼시킨 후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련가, 아내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처덕은 거기까지였다. 전주 예수 병원에서 폐질환으로 입퇴원을 거듭했다. 마지막엔 백제 병원에서 20여일 만인 2004년 3월 20일 예순 다섯으로 이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정작 자신의 소생은 결혼도 못 시키고 말이다.

필자는 어르신의 일기장 중 2004년도 노트를 집으로 가져와 읽어보았다. 어르신의 자식들은 서울이며 대전이며 여기 저기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어머니가 투병하는 동안 자식뿐만 아니라 며느리, 사위 할 것 없이 연일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후 기제사에도 친모와 똑같이 그 어머니 기일에 참석하여 애도하였다. 새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사며 농사일을 해냈다. 행복한 세월이다. 막내는 일찍이 부모 슬하를 떠나 사다리차 기술을 배워 착실히 돈을 벌었다. 어머니 생전엔 사춘기를 유별나게 보내느라 있는 애 없는 애 다 태우더니 철들자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고, 그의 삶 역시 형과 누나 못지않게 우뚝 섰다.

 

 

천국의 소리-장구소리

 

어르신은 회갑 잔치를 제대로 치루셨다. 행복했다. 막내만 결혼 전이고 아들 둘에 딸 넷이 마음을 합쳐 잔치를 크게 잘 차려 주었다. 딸 며느리는 꽃분홍 저고리에 남빛 치마, 아들 사위는 분홍 저고리에 연분홍 바지를 단체로 지어입고 잔치를 빛냈다. 내외에게 인생 절정의 시절이었다.

어르신은 부인을 잃은 후 완전히 혼자였다. 막내까지 외지에 나가 직장을 다니던 때였다. 죽을 만큼 슬프고 외로웠다. 아무 것도 할 마음도 없고 할 수도 없어 삶의 손을 놓아 버린 상태였다. 끼니를 거르며 술타령으로 대신했다. 사람 망가지는 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폐인 직전에 이장의 권유로 어르신은 공공 근로자 취로 사업을 신청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다. 일하게 된 곳은 계백장군 백제 군사박물관이었다. 오고가는 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담당자에게 하소연했더니 이틀 후 ‘견훤 왕릉’으로 바꿔 주었다. 이곳은 집에서 가까운 홈그라운드나 진배없었다. 얼마 후 지산동 종합복지관 청소 일을 맡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어르신은 어느 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영혼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공공 근로는 10시부터 세 시간의 일이었다. 그는 청소하다 어디서 들리는 장구 소리에 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곳으로 향했다. 깜깜한 밤중에 불빛을 본 것이다. 그의 영혼에 불이 켜지는 소리였다. 다음 날은 담당자에게 “몸이 아파 병원에 다녀온 후 일하겠다” 약속하고 농악 교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16년이 흐르도록 그는 농악에 장구를 치고 꽹과리를 치며 상쇠 노릇을 했다. 후에 논산 제일감리교회 늘푸른대학에서 풍물강사가 되어 장구, 꽹과리를 가르쳤다.

 

또다른 별천지 ‘복지관’

 

어르신은 아침 8시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의 복지관으로 향한다. 필자는 그 시간에 시내 한의원에 치료를 받으러 잘 나가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 어르신을 만난다. 앞자리에 앉는 편이다. 가끔 버스가 만원이 되면, 나중에 타는 노인에게 꼭 자리를 양보하고 맨 뒤로 오신다. 물론 그 안노인은 당신보다 연하이다. 마을 노인회장답다. 점심은 복지관에서 드시고 3시에 시작하는 스포츠댄스 교습이 4시에 끝나면 5시 버스로 집에 오신다. 6시가 넘는다.

건강하고 흥이 많은 어르신은 일주일에 3일은 스포츠 댄스를 배우신다. “워낙 동작이 어려워 하루라도 빠지면 못 따라 한다”고 절대 빠지는 법이 없다. 건강 체조는 목요일 금요일 두 번인데 16년간 계속해온 프로그램이다. 처음 시작할 때 강사가 임신해서 나은 애기가 지금은 중학생이란다. 농악은 월요일 수요일에 하신다. 그 전엔 수영도 하였고, 고전무용반에서는 여자들 틈에서 부채춤을 배워 공연도 다니셨다. 판소리도 배웠다. 동네에서 게이트볼도 쳤지만 근래엔 복지관에서 금요일까지 살다시피 하신다.

마을의 밤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여, 논산시 노인의날 행사 때 에어로빅으로 우승하여 도대회에도 참여했다. 필자도 같은 회원이다. 청양 대공연장에서 우리 마을 ‘즐거운 인생팀’은 두 번이나 준우승을 했다. 

어르신은 공연을 많이 다녔고 정읍 농악경연대회에서 꽹과리로 개인상도 받았다. 스포츠댄스 경연대회에서도 상을 받았다. 작년엔 노래교실에서 네 번이나 행사에 참여했다. 강경 젓갈 축제 때는 찬조 출연이었고, 세 번은 합창대회였다. 두 번 입상했다.

 

 

지끈공예 선물하며 되찾은 삶의 환희

 

부인은 떠나보냈지만, 복지관 생활이 시작되면서 살맛을 되찾았다. 삶이 고마워 열심히 복지관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밤이면 텅 빈 집의 냉기가 마음까지 얼게 했다. 운명이려니 마음을 달래며 허전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점점 더 우울이 깊어갔다. 마을 진료소장의 권유로 논산 보건소에 정신 건강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그 때 보건소 프로그램 중에 지끈 공예가 있음을 알았다. 어깨 너머로 참관했다. 어린시절 짚신 삼던 실력이 있어 금세 바구니를 만들 수 있었다. 강사 선생님의 배려로 지끈을 받아 밤에 바구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미가 붙어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몰두하다보니 밤 시간도 낮처럼 밝아갔다. 

개인적으로 끈을 사들여 밤이면 바구니를 붙들고 앉는다. 완성되면 자식 손자 손녀들에게 주기 시작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했다. 선물할 사람을 미리 정하고 지끈으로 귀중품보관함 같은 공예품을 만들었다. 선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논산 공예품경진대회에 출품해서 장려상도 받았다. 봉동보건진료소장은 인터넷을 뒤져 박스로 색색의 지끈을 구입해 드렸다. 완전 자비(自費)로 한 번에 21만원씩 세 차례 구입하여 현재 선물한 공예품은 280개이다. 

이 공예는 ‘지끈 공예’라고 하여, 이미 종이끈이 만들어져 쉽게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다. 원래 우리 한지를 잘라 실을 꼬아 만드는 것은 ‘지승 공예’라 하며, 우리 전통공예에 속한다. 보통 눈으로는 구별이 안 간다. 지금도 여전히 만드신다. 그 일을 시작하면서 우울을 뛰어 넘어 행복한 하루하루이다.

어르신이 이렇게 활동하실 수 있는 원동력은 건강이 좋으신 탓이다. 현재까지 고혈압은 없고 당뇨 초보 단계의 약만 드시나 보다. 어르신 곁에는 주치의 보건진료소 소장이 있다. 진료소 약값은 이야기다. 자신의 모든 속사정을 풀어 놓으신다. 소장은 그분 이야기를 다 들어 준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타고난 건강 체질에다가 밝게 사는 덕분일 것이다. 하늘의 보상이 아닐까도 싶다. 고생고생하며 착하고 우직하게 산 사람에게 주는 하늘의 보답! 

 

메주 써주는 시아버지

 

아침나절 비바람치고 날씨 사나웠다고 오후에 개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어르신은 장밋빛 노을이 타는 저녁이다. 비록 혼자 살고 있지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아침 8시에 집을 나가는 순간 혼자가 아니다. 

장밋빛 신나는 인생에서 여자 친구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복지관에만 가면 여자 친구들이 수두룩하다. 엊그제는 한 여자 친구가 그릇을 사 주더란다. 복지관의 삶은 즐거운 인생의 터전이고 놀이터이다. 몇 년 전까지는 진짜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이젠 오빠라 불러주는 후배를 친구라 말한 것이다.

아직 어르신의 삶엔 신명이 앞장선다. 장구 소리만 나면 덩실덩실 춤이 나온다. 며칠 전 동네 판소리 시간에도 그러셨다. 그때 그 장면 한 컷 찍었다.

부인과 사별 후 논도 밭도 직접 돌보지 않는다. 유일하게 메주콩만은 심는다.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직접 메주를 쑤신다. 그것으로 봄에 장을 담가 딸들이고 며느리에게 내준다. 김장김치도 손수 담가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 말은, 내가 그 동네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아들과 며느리가 대치 상태라면 무조건 며느리 편을 들어 주는 듬직한 시아버지시기도 하다. 꼼꼼하고 깨끗하기가 보통여자 저리가라다. 홀로된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의탁하지 않고 끝까지 자립하고 싶은 게 어르신의 소망이다. 이런 어르신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게 지끈 공예다. 이어지고 이어지는 인연의 끈이다. 

 

[글·사진] 안정혜 시민기자

[기획편집]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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