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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천호리 이호구(李好求)님 “슬픔 꾹꾹 눌러쓰니 웃음꽃으로 피어나요”
기사입력  2019/04/16 [18:14]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천호리 이호구李好求님의 인생노트]

“슬픔 꾹꾹 눌러쓰니 웃음꽃으로 피어나요”

 

바다를 알기 위해 바다로 들어간 소금인형처럼 어머니도 우리를 위해 엄마의 바다에 들어가셨다. 어머니가 흘린 눈물만큼 얼굴이 주름졌고, 어머니가 내쉰 한숨만큼 손은 거칠어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만큼, 우리는 그만큼 자랐다.


 

이호구(李好求)

  • 1942년 3월 연산면 청동리에서 출생
  • 1962년 강경 이사 후, 유복근 님과 결혼
  • 1963~72년 2남 3녀 출산
  • 1970년 남편 발령으로 대전 이사
  • 1978년 현재 집 위치로 시부모님 이사
  • 1996년 남편 은퇴
  • 2005년 대전에서 천호리 집으로 내려옴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나는 1942년 3월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6·25전쟁 발발 당시 연산역 근처에 살았는데 밤에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폭탄을 던져 철로가 끊어졌다. 피난은 가지 않고 땅에 굴을 팠다. 비행기 소리가 나면 굴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아파서 오랫동안 누워 계셨던 것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내가 10살쯤, 어머니는 내가 12살쯤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내가 깨물어쳤다고 한다. 어머니의 행여(상여)를 본 기억이 없다. 오빠 둘에 막냇동생은 세 살이어서 나는 국민학교는 입학도 못 하고 막냇동생을 키우며 살림해야 했다. 

 1964년 무렵 큰오빠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돼서 강경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연산면 천호리에 고모가 살았다. 고모 생신이라 왔는데 시어머니 되실 분이 나를 보고는 고모에게 중매를 넣었다. 나는 부모님이 안 계셔서 어른 모시는 게 어려워 장남이 아닌 둘째나 셋째에게 시집갔으면 했다. 그 당시에 여자들은 바느질이나 수놓는 것을 배우고 그랬는데 나는 배우질 못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바느질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기도 했는데, 시어머니가 계속해서 결혼을 졸랐다. 나는 시집가기 싫어서 노성면에 있는 외삼촌댁으로 도망가 있었다.

 우리집 양반도 당시에 결혼을 안 하려고 했다. 우리 둘째 오빠도 시집 안 보내려고 했는데 고모집에 와서 보니 우리집 양반과 동창생이었다. 우리 친정 오빠는 연산국민학교를 다녔다는데 공부를 잘했고, 우리집 양반은 공부도 잘했지만 달리기를 정말 잘해서 서로 알고 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오빠가 시집을 가도 된다고 허락했다.

 

시어머니와 질녀

 

며느리 사랑은 시어머니

 

신랑 친구가 연산에서 사진사라 사진도 많이 찍고 엄청 푸짐하게 결혼식을 지냈다. 남편은 연산면사무소에 다녔고 친구들이 엄청 많았다. 그 당시에는 신랑을 목말을 태워서 초례청에 데려왔다. 결혼식을 정신없이 끝내고 방에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생각나서 엄청나게 울었다. 그런데 밖에서 신랑이 바꿨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혼자 있는데 덜컥 겁이 났다. 친구들이 장난으로 신랑 바지저고리를 뺏어 입은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신랑이 바꿨다고 그러니까 엄마 생각이 더욱 나서 마음이 심란했다. 우여곡절이 많은 하루가 지나갔다.

 강경에서 택시를 타고 시댁으로 출발했다. 마을에 도착했는데도 택시는 자꾸 산으로 올라가더니 다 찌그러진 집 한 채 앞에 섰다. 시집이라도 오면 좋은 집인 줄 알았는데 너무 가난했다. 전깃불도 없어 등잔불을 켜고 살았고 수돗물도 없어 우물에서 길어 먹어야 했다. 우리집 양반은 면사무소로 출퇴근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밤에 신랑이 오면 참고 살다가 낮이면 또 울었다.

 시어머니는 아들 하나 장가보내는데 며느리한테 “어머니!”라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부모가 안 계시니까 고모가 항상 “시어머니가 뭐라고 해도 참고, 호박 하나를 따먹어도 묻고, 참고 살아라, 참고 살아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께 항상 “예, 예” 했고 한마디도 “아니라” 고 해본 적이 없다. 어머니 역시 내가 일할 줄 모르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을 못 한다고 꾸중하지 않았다. 시집와서 며칠이 됐는데 어머님이 명주를 내놓으시고 해보라고 했다. 내가 웃기만 했더니 당신이 꿰매 입고는 “우리 며느리가 해줬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셨다. 딸이 해와도 며느리가 해왔다고 하였다. 부모가 그렇게 하니까 시누들도 내게 정말 잘했고, 지금도 잘한다. 

 내게 아무리 잘하셔도 시어머니에겐 아들이 최우선이었다. 아들을 넷이나 잃어서 우리 어머님이 하나 남은 우리집 양반을 끔찍이 애꼈다. 조금이라도 밭일을 못 하게 했다. 고구마도 맛있게 생긴 것은 아들만 줬다. 쌀이 귀할 때는 쌀밥 한 사발만 소복이 퍼서 이 양반만 줬다. 시아버님이 계셨어도 아들 밥 먼저 푸고 남편 밥을 펐다. 만약 내가 보리밥을 조금 섞어서 푸면 당신이 다시 밥을 펐다. 어머니에게 아들이 먼저고, 그 다음이 남편 밥이었다. 

 

돈으로 못 사는 인생교육

 

우리집 양반이 대전시청으로 발령이 나서 대전으로 올라갔다. 그 당시에는 공무원 생활을 해도 혜택이 없고, 아이들이 많다고 집주인이 방을 주지 않는다. 변두리를 찾아가면 교통비가 많이 나오고 나중에는 집세를 올려달라며 이사하라 하고 그랬다. 이사를 무지하게 다녔다. 그런데 그런 고생이 지나고 보면 아이들에게 다 공부였다. 애들에게 공부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인생 공부를 하게 해야 한다. 방을 얻을 때 무척이나 설움을 받았다. 앞마당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집주인이 지나다니지 못하게 했다. 애들이 인생의 고난을 겪으면서 나름 단단해졌다. 큰아들은 시험 봐서 소방공무원이 됐는데, 집 장만해야 한다고 꼭 필요한 돈 이외에 안 넣고 다닐 만큼 아꼈다. 애들이 인생 공부를 하니까 스스로 발등의 불을 끄는 것 같다. 

 둘째 며느리로 시집간 딸도 맏며느리처럼 시댁에 잘하면서 산다. 물론 내게도 무척 잘한다. 집에만 오면 약이고 뭐고 다 사놓고 간다. 층층 거리로 약이 떨어지면 사놓고 그랬다. ‘금쪽같은 딸들이라’ 그전에 어머니는 손녀가 태어나면 “하나 달고 나오지, 하나 달고 나오지” 항상 그러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금쪽같은 딸들이다. 며느리 숭(흉)이 아니라 나도 며느리지만, 며느리는 딸들처럼 그렇게는 못 한다. 며느리도 친정엄마에게 그럴 테고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딸들은 내가 뭬라고(뭐라고) 해도 잔정이 있어서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려듣고 잊어버린다. 사위와 며느리는 항상 어렵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말 한마디는 천 냥 빚을 갚는다고 진짜 조심해야 한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며느리와 사위에게 대하니까 며느리도, 사위도 참 잘한다.

 

 

화마(火魔)가 모든 것을 앗아가도

 

어머니는 가끔 한 번씩 느닷없이 쓰러지시면 포룡환을 드시고 괜찮아지시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그날은 포룡환을 잡숫지 못했다. 1990년에 돌아가셨는데 아버님 생신이 9월이라 “미리 생신을 잡숫겠다”고 해서 애들을 다 오라고 했다. 시누도 다 오고 그랬는데 어머니 몸이 안 좋았다. 군에 갔던 우리 둘째 아들도 나와서 온 가족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시아버님은 몇 년을 병환으로 고생하셨다. 목욕시키면서 면도도 해드렸다. 큰일 보시고 치우라는 게 아니었는데 당신이 직접 달력으로 씻는 통에 냄새를 풍기곤 하셨다. 연세도 많으시고 뱀에도 여러 번 물려서 건강이 악화됐다. 마음대로 못 다니시고 항상 집에 계셨다. 

 1994년 4월 어느 일요일, 남편은 집에 와서 산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돼서 밥을 먹으러 내려가려는데, 저 아래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정신없이 내려왔지만, 이미 집은 거의 전소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그때 당시에는 집 앞 전부가 논이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신고했지만 다 타서 소용없었다. 거동이 불편하셨던 아버님도 참사를 당하셨다. 비닐을 치고 시신을 모셨는데 4월이지만 몹시 춥고 바람이 불고 땅에서는 습기가 올라와 무척 힘들었다. 황망하게 돌아가신 아버님도, 삶의 터전인 집이 불탄 것도.....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었다. 집에는 며느리가 이부자리 새로 해온 것, 딸 시집보내려고 해 놓은 것이 그뜩했다. 집을 새로 고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그랬는데 그게 다 탔고 그릇도 다 녹고 남은 것이 없었다. 

 화재로 살 곳이 없어서 대전에 사는 아들 집에 가 있었다. 화재로 아버님 돌아가시면서 부고도 제대로 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많은 사람이 문상을 와주었다. 그 부좃돈과 융자를 받아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살갑게 구는 지인에게 일을 맡겼다. 처음에는 일을 잘했다. 돈을 미리 달래서 사람을 믿고 줬는데 마무리가 제대로 안 돼 엉망이라 다시 손봐야 했다.

 

고향계 모임

 

친구라는 이름으로

 

처녀 때 같은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과 하는 고향계가 있다. 연산 청동리 부락 사람들로 다들 전국 각지로 시집갔는데 연결돼서 계한 지 20~30년 됐다. 계원은 모두 여자고 나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다양하다. 젊어서는 다들 고생했고 내 또래는 공부를 별로 못 했다. 다들 시집가서 이제는 다들 밥 먹고 산다. 돈을 모아서 전세방을 얻어서 한 달에 한 번 계를 할 때만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오래 되니까 전셋돈을 파해서 노놔(나눠) 쓰자고 했다. 그 뒤로 일 년에 두 번 만나고 있다. 

 계를 하면 서울, 인천, 평택, 익산, 대전 등 여러 곳에서 온다. 처음에는 20명이었는데 죽은 사람도 그만둔 사람도 있어 지금은 조금 줄었다. 나는 좀더 나중에 들어갔다. 시부모님을 모시니까 내게 연락하기 힘들었다. 둘째 시누가 알았는데 부모님 모셔서 어려울 것 같다고 해서 조금 늦게 들어갔다. 

 작년 7~8월인가 논산에서 어물 장사하는 분 팔순이라 모여서 회를 먹었다. 지난번은 12월 초순에 만났는데 김장하는 날과 겹쳐서 처음으로 참석을 못 했다. 우리 계원들은 다들 참 착하다. 거짓말 조금 해서, 입에 있는 것도 빼줄 정도다. 만나면 언니, 동생 하면서 그렇게 지낸다. 정말 어느 형제가 그렇게 하나? 그렇게 못한다. 밤새도록 진짜 재밌게 논다. 옛날 얘기하고 ‘단장의 미아리’나 현철의 ‘고요한 내 가슴에’ 같은 옛날 노래하고 그런다. 내가 어지간한 옛날 노래는 다 안다. 만나면 한 이틀씩 잔다. 서울서 온 사람은 한 삼일씩 건양대 입구에 있는 총무 집에서 지낸다. “우리 <인간극장>에 나가면 좋겠네” 라며 우스갯소리도 한다. 

 큰 관광차 하나 빌려서 다른 사람들 없이 10명이면 10명, 20명이면 20명으로 갔다. 지금은 다들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그래서 그렇지, 다들 맘들은 있다. 지금은 12~14명 정도 모인다. 아쉬운 일이 있었는데 한번은 “한복 입고 오라”고 했다. 다 한복을 입고 기사가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사진이 안 찍혔다고 하나도 안 줬다. 

 

남편 유복근 님의 퇴임식

 

인생은 롤러코스터

 

둘째 아들이 회사에 다니다 어째 내려와서 농사짓겠다고 했다. 연산에다 집을 지으려면 융자를 얻어야 하고 이래저래 속상해서 면장님에게 하소연했다. 면장님이 젊은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니 기특하고 착하다며 칭찬했다. 아들은 나중에 엄사리로 이사하기 전에 동네서 이장을 봤다. 그 당시 마을에 회관이 없어서 우리 집에 와서 회의도 하고 음식도 해서 먹었다. 회관이 없어서 애로 사항이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 회관을 지으려 노력을 했다. 회관 짓는 것을 설득해서 추진한 사람이 아들이다. 이장을 잘 봤다고 돈을 몇 푼 주느니 비석을 세우라고 해서 마을에서 아들의 이름이 새긴 비석을 세워줬다. 

 그런데 아들이 비료사업을 시작했는데 크게 실패를 봤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이유로 몇 년 동안 왕래가 끊겼다. 전화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아 속을 많이 썩었다. 그래서 내가 우울증이 생기고 밤이면 집이 뱅뱅 돌고 그랬다. 누군가 텃밭에 이런저런 채소가 나니까 남는 농산물을 팔아보라고 권했다. 돈이 조금 생기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니 생각이 줄고 저녁에 잠도 잘 오니 살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음식도 깔끔하게 하고 맛있다’며 전화번호도 적어가고 그랬다. ‘채소를 깨끗하게 다듬어 온다’고 칭찬하는 전화도 더러 오고 그랬다. 여기 있던 사람이 서울로 이사를 하였는데 내게 ‘착한 할머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고추를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 화·금요일에 장사하러 나가는데 고맙게도 이웃에 이사 온 사람이 나갈 때 실어다 줘서 편하게 댕긴다. 

 해동하면 풀을 뽑느라 바쁘다. 그런데 요즘은 몸을 애낀다. 자식들이 엄마 아플까봐 무섭다고 몸을 애끼라고 한다. 마을회관에 비석 세우는 날 뇌경색으로 쓰러진 적이 있어서 더욱 걱정한다. 사람 하나가 아프면 온 식구가 고생이란 걸 안다. 예전에는 겨울에 눈이 와도 갔는데 요즘은 안 간다. 



 살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순간이 한 번도 없었겠는가! 서글픈 눈물을 닦아내면서 마음을 씻어내고, 생을 끝내는 독한 마음보다 더 지독한 생의 의지로 살아온 세월이라 의미 있는 것이다. 이호구 님은 참 많이도 울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미소가 아름다웠다. 웃을 때 생기는 주름은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고왔다. 세월이 준 주름이야 어쩔 수 없지만, 마음이 주름지지 않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살면서 가장 아픈 손가락인 둘째 아들에게서 어느 날 연락이 왔고, 작년 추석에는 며느리와 아들 내외가 집에 다녀갔다. 올 설에는 5남매를 데리고 모두 왔다. 웃으면서도 가슴 한쪽이 저렸을 거다. 그 먹구름마저 사라진 지금, 그래서 미소가 더욱 빛나지 않을까!

 처음 마을회관에서 한글 공부를 시작하는데 둘째 아들이 생각나 가기 싫었다고 했다. 아들 소식도 모르는데 당신이 거기서 무슨 공부가 머릿속에 들어가겠나 싶어 며칠을 뒤에서 구경만 하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이호구 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한글을 배우면서 일기를 쓴다. 허락을 받아 노트 한 권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아들에게, 딸에게, 남편에게, 선생님에게, 손주들에게’ 쓴 다음에 ‘참 좋은 세상’과 ‘살맛나는 인생’에 대해 썼다. 그리고 일기장 마지막에 ‘나무 이야기’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누구의 엄마, 아내, 할머니가 아닌 이호구 님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 같다.                        

             

- 박용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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