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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뫼알릴레오7] 은진미륵은 왜 대례관(大禮冠)을 쓰고 있을까?
기사입력  2019/05/14 [13:12]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동북아 정세와 고려의 위상

 

요즘 참 역사를 되찾자는 결기가 열화같이 번지고 있는 가운데,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에서 발표한 고려 국경선 연구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고려 서북 국경선은 발해만 만주 요하(遼河)였으며, 동북 경계는 현 흑룡강성 동녕현(東寧縣) 선춘령(先春嶺) 공험진(公嶮鎭)으로, 개략의 국경선이 마치 활모양 같다.

고려가 등장하던 시기(918) 동북아 정세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중국은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소위 5대 10국 시대가 되었고, 916년 건국한 거란은 926년 해동성국 발해를 평정하면서 북방의 패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 혼란을 틈타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에 쫒기는 왕족과 발해유민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북방으로 나갈 발판을 만들었다. 북방 고토회복 전진기지로 옛 평양성(현, 요양시)을 되찾아 서경(西京)으로 삼은 것이다. 남으로는 후삼국 통일대업을 완성(936)하여,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강역을 확보함으로써 국력은 확장일로에 있었다. 

따라서 고려는 꿀릴 게 없었고 고려, 송, 거란(요)이 각축하는 동북아 세력균형자 한 축을 담당하여 중원과 대등한 입장에서 황제라 하고 독자 연호를 썼다(稱帝建元). 태조 연호는 천수(天授)였고, 은진미륵을 세운 광종 연호는 광덕(光德), 준풍(峻豐)이었다. 황제의 호칭은 ‘폐하’였으며 안사람은 황후로, 후계자는 태자와 태자비라 불렀다. 조선이 제후국 지위를 말하는 전하, 왕비, 세자, 세자빈으로 칭했던 것과 대조되는 고려의 자긍심이다.

 

고려 자존의 상징 은진미륵

 

은진미륵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 고려 자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은진미륵이 쓴 보관(寶冠)은 바로 고려의 위상을 만방에 알리는 황제 대례관일 가능성이 높다. 대례관(大禮冠)은 황제나 왕의 등극 또는 천제(天祭)단에 오를 때와 같은 국가의 중요행사에 쓰는 관을 말하는 것이다. 은진미륵 관은 조형성의 문제로 가로 형태로 만들었다. 관모를 쓴 불상은 고려의 독자성과 힘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연꽃을 새기어 화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기존 것과 다른 사각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는 옛 사람들의 우주관에 따라 지상의 지존을 표징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관촉사(灌燭寺) 작명 설화에도 은진미륵 미간에 박힌 백호광명이 중국 송나라까지 비춰 지안대사가 그 빛을 따라왔다 했는데, 은진미륵은 동남방을 향하고 있어 고려 서쪽에 있는 송나라를 비출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 설화의 속내는 바로 고려의 문화가 중국 송나라에 버금가는 위상에 있다는 자신감을 에두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은진미륵의 제작방식도 기존과 같은 도상(설계도)을 먼저 참조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았다는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암반’이라는 외적조건에 맞추어 진행된 것이다. 따라서 도상에 따른 정제된 돌을 다루는 제작방법보다 훨씬 난관이 많다. 더구나 불상크기가 아파트6층 높이의 돌이었을 때 재료에 대한 이해와 방법을 확철하고, 환경과 불교교리에 투철해야 할 뿐 아니라, 심량이 광대하지 않고는 꿈도 꿀 수 없다. 이럴 때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억지로 이입하는 대신 주변 여건에 맞추는 사유의 신축성이 요구됨으로 기존의 형식과 틀을 깨는 창작정신이 우선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술사에서 고전기를 지나면 여러 사조의 변천과정을 겪듯이, 고려에서 불교의 이념표현 수단이 불상에서 불화로 옮겨감으로써, 세계종교사에 고려불화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불화(佛畵)만큼은 고려가 오히려 고전(古典)의 전범(典範)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불상에서는 정제미의 통일신라와 다른 개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짙게 배어 있다. 마치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양식이 흐트러지는 16세기 바로크 미술처럼, 불상도 표현양식에 변화가 온 것이다. 도상을 떠나 작가의 상상력이 투영되기 시작한 것인데, 그 출발이 은진미륵이다. 은진미륵은 강도가 가장 센 화강석으로 된 사실 기법의 독립상이다. 독립상은 작품의 장단점이 금방 드러난다는 점에서 은진미륵은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석불의 빛나는 부분은 얼굴인데 신앙대상으로서 표정이 후덕하며, 자비롭고, 원력의 가피를 받을 수 있는 힘을 간직한 느낌을 받는다. 얼굴은 과장되어 있으나 조각기법이 뛰어난 까닭에 단점을 상쇄하고 있다. 눈은 얼굴 옆면까지 새겨져 마치 이집트 벽화 얼굴처럼 옆에서 보아도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귀 모양이나 머리카락의 섬세한 표현에서도, 기존양식을 벗어나 작가의 개성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또한 얼굴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아래에서 볼 때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현실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머리카락 위 관모는 정치적 의도를 반영한 어색한 면도 있으나, 이로 인하여 세계에 없는 고려 특색의 불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파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진미륵의 또 하나 비밀은 맨 위 작은 관모 중앙에 반개한 연꽃 봉오리에 있다. 왜, 작가는 이중관을 만들면서까지 꽃을 숨겼을까? 이 꽃봉오리 끝을 꼭지점으로 하고 불상 귀 끝으로 선을 그으면 정확히 원뿔 같은 고깔 모양이 된다. 팔각 관모 통은 위로 체감 비율로 좁아지고 있어, 마치 석불의 상승하는 기운이 연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하여 집약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나는 앞에서 은진미륵의 관은 황제대례모라 한 바 있다. 그렇다면 관 가운데 연꽃은 장식이라기보다 고려를 은유하는 꽃으로 보인다. 만개하기 전 국력을 집중하여 응축해야 할 고려 초기를 지나, 미래에 국운이 부처의 가피로 피어날 수 있게 서원하는 의미로 읽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진미륵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비밀을 간직한 석불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회자되는 설화와 해석하는 시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름부터도 민중들은 그냥 선지자처럼 온다는 ‘미륵(彌勒)’이라 불렀고, 그 외 석조관음보살입상, 석조미륵보살입상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살(菩薩)’은 대승불교의 특징으로, 깨달음 중심의 소승에서 봉사정신의 대승으로 옮겨간 실천적 인간상을 신앙화한 것이다.

그런데 불상은 보통 수인(手印)으로 어떤 부처의 모습인지 알 수 있는데, 은진석불 수인은 아미타 9품 중-오른손은 중생중품 수인을 한 채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중생하품 수인을 하고 있다. 연꽃을 든 것으로 보면 관음보살상이고, 수인으로 보면 아미타불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할 때 그 ‘아미타’와 관음이다. ‘나무(南無)’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사한 것인데 ‘귀의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을 일명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 하고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하는데, 불성(佛性)의 두 축인 지혜와 자비를 빛과 생명 염원으로 치환한 이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은진미륵을 발원한 고려 광종(光宗) 묘호에 ‘빛 광’이 있고, 연호가 또 광덕(光德)이다. 

우리나라는 관음신앙이 먼저 퍼졌고, 아미타 신앙과 미륵신앙은 후대에 유포되었다. 모두 민중의 신음 소리를 먼저 챙긴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아미타불은 정토종에서 섬기는 부처인데, 신라 원효는 “화려하고 어려운 교리는 서민들의 위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나무아미타불!”만 정성으로 염송(念誦)해도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설파했다. 민중구제를 우선한 자비의 마음인 것이다. 고려에서도 상부층은 화엄종이 대세였으나, 백성들은 미륵이 하생하여 고단한 삶에 평화가 오기를 갈망하였다. 특히 나라 잃은 백제 유민들의 한은 깊었을 것이므로, 조각장이던 혜명스님과 광종은 통일과정에서 생채기 난 백성들의 마음을 보듬어 안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관음, 아미타, 미륵신앙 이미지가 중첩된 은진석불은 명칭과 관계없이 세간의 민중 염원과 고려의 염원이 천년을 이어 면면히 신앙대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살펴야 한다.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은진석불을 과소평가하여 비례가 엉터리라거나, 지방색이 짙다거나, 조형성이 떨어진다는 등 여러 소리가 많았다. 만약 인체 비례를 의식하여 기존 자연암반의 양 괴를 반으로 줄였다면, 지금과 같은 풍성한 석불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하체의 비례에 준하는 상체의 돌을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이어붙인 석불의 팔 부분이 잘 말해주고 있다. 

 

운강석굴(중국)

바미안 석불(아프가니스탄 )

 

자연지세를 이용한 세계 거대 석불들 중 어느 것도 비례가 일치하는 불상은 없다. 거대석상 자체가 과장의 수순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국 운강 석불,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 등은 모두 석굴형식의 고부조이면서 사암에 새겼다. 사암은 무른 까닭에 화강암보다 조각하기가 쉬움에도, 운강대불(좌불)은 얼굴부터가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닐 뿐더러 귀는 얼굴과 따로 놀고, 양팔이 과장되어 어깨가 넓어졌는데 안쪽 가냘픈 상체와 얼굴을 비교하면 어색하다. 더구나 거의가 되다만 미완성작이다. 71m의 바미안 석불은 몸체 길이에 비하여 얼굴이 작다. 이럴 경우 은진미륵처럼 오히려 두상을 과장해서 표현해야, 아래서 볼 때 현실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비례가 안 맞는다는 생각 아래 석불을 관람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작품은 현장성이 강해서 분위기 등 환경의 여러 조건이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은진미륵 감상의 압권

 

은진석불의 압권은 허리 부분 손부터 관모가 시작되는 머리카락까지이다. 화가들이 구도 잡을 때 쓰는 가위 손으로, 한쪽은 손등을 보이게 하여 두 손 가위를 맞대면 직사각 틀이 되는데, 이 틀을 뉘여서 석불 중앙부를 보면, 보일 듯 말 듯 법열(法悅)을 삼키는 미소와 넉넉한 얼굴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얼굴은 후덕하여 중생들 마음을 위로하면서도, 당시 사람들의 서원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을 수반한 고려불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또 가위 손 틀을 세워서 하단 발부터 이마에 겹친 머리칼까지 보면, 비례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이것을 ‘심리적 미감’이라 하는데, 숫자로 따지는 서양의 비례미와 다른 동양미의식이다. 소위 이성미와 감성미로 이해하면 빠르다. 감성미는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은진미륵은 하단 발을 살짝 덮은 옷자락이 나부끼고 있어, 바람 방향까지 알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런 감성이 수승한 작가에 의하여 여러 난제를 넘어 완성까지(1006) 37년을 보낸 후, 다시 천 년 동안 나라의 애환을 지켜본 지혜로운 불상이다. 이 석불 제작에는 신앙의 열정, 백성들의 삶에 대한 배려, 동북아정세 배경 등 여러 복합요인이 작용하였다. 이러한 요소를 외면한 채 18.12m의 석불을 과시용으로 건립했다고 하는 그 생각이야말로, 의미 없이 뇌까리는 앵무새와 같다. 

충남 논산은 전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고, 후 삼국통일 대업을 이룬 고려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상징적인 곳이다. 이것이 고려태조 왕건이 대가람 개태사를 세우고 국사(國師)를 상주하게 했으며, 그 아들 광종이 은진미륵을 고려의 표상으로 삼은 이유이다. 2018 고려건국 꼭 1100년 되는 해에 은진석불이 국보로 승격되었다는 것은, 지금 한반도 통일 기운이 다시 우리 고장으로부터 싹트는 조짐을 예고하는지 모른다. 자부심을 가질 일이다. 

 

김용수

조각가로 논산이 고향이며, 서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30대 막바지에 서양 교육제도에 의해 이입된 세계와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던 중 낙향하여, 동양사유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 정립에 몰입하고 있다. 논산시상징조형물을 제작했으며, 몇몇 대학에서 강의했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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