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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일간의 6.25전쟁, 그리고 900일간의 대둔산 공비토벌
-전)서울시경찰청 공보담당관 김연수옹의 생생한 기록-
기사입력  2019/06/19 [18:11]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시 까지 1129일간 치러진 6.25전쟁은 국군 전사 및 사망 13만 7,800여 명을 포함하여 부상·실종·포로가 약 48만 명에 달하였다. 유엔 참전국 역시 미군 전사 36,940여 명을 포함하여 부상·실종·포로가 약 16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 지역 대둔산 일원에서는 3년간의 동족상잔(同族相殘)도 모자라 휴전 후에도 900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좌익무장유격대와 공비토벌 전투를 이어갔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시 미처 북쪽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과 인민군 부역자 등이 대둔산에 숨어 들어가 좌익무장유격대를 구성하여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치안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관련지역 주민들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1956년 1월 공비토벌 완료시까지 수백회의 교전으로 경찰관, 의용경찰 및 애국청소년 등 1,376명의 젊은 조국의 수호신들이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6.25전쟁 발발 69주년을 맞이하여 김연수 전)서울시경찰청 공보담당관의 생생한 증언을 지면으로 옮겨 본다. (편집자 주)


 

▲ 대둔산월성고지(가운데 평평한 봉우리_사진 오른쪽에 멀리 벌곡면 마을이 보인다)     © 논산계룡신문



1. 지역 특수 역사와 공비토벌 현장 탐방동기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 뒷산 깃대봉(300m) 능선에는 계백장군의 지휘본부가 있던 황산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부터 1,359년 전인 기원 660년 백제와 신라가 운명의 결전을 벌인 황산벌이 황산성 앞에 펼쳐져 있으며 그 맞은편에 우뚝 선 산이 군사(軍師)가 있었던 국사봉이다,

국사봉 넘어 전면 앞 마을이 산직리이다. 이곳은 백제군의 전방 전초기지로 조그마한 성을 쌓았는데 나중에는 신라군의 최전방 지휘소가 되었다는 작은 성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동내 이름이 "성안"이다.  

황산성 바로 아랫마을이 관동리인데 관동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신라 화랑 관창을 생포했다가 가여운 소년이라 하여 계백장군이 돌려보냈으나 또다시 돌격해 와 처단한 곳이라 하여 관창의 이름을 따서 관동리가 되었다고 한다. 황산성은 현재 복원작업 중이고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함지봉과 국사봉 사이 넓은 황산벌 끝자락에는 서울 수색에 있던 우리나라 최고 군사교육기관인 국방대학교가 들어서 있고, 이곳에서 약 2km 남쪽에는 백제 최후의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계백장군 묘와 당시의 역사를 재현해 놓은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다. 

뿐만 아니다. 후백제왕 견훤의 장남 신검이 자기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후백제 왕을 자처하며 고려 왕건과 세 대결을 할 때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 왕건에게 투항하여 왕건으로부터 상부의 대접을 받으며 신검을 토벌하기 위해 15만 고려군 선봉장이 되어 이곳 개태사의 뒷산 천호산에서 신검의 거점 황산성과 마주보며 대결하다가 신검의 항복을 받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후 왕건이 직접 신라의 불국사와 같이 호국불사의 발원문을 지어 개태사를 창건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현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도 지나치게 왜소하게 있다. 논산시에는 특히 가을 등산에 인기가 있는 대둔산(878m)이 있다. 이 산은 우리나라 산맥 13정맥 중 하나인 전북 진안 주화잔(조약봉)에서 발원하여 연석산, 운장산, 인대산, 배티재(梨峙), 대둔산, 말똥재(무수재), 군지골, 월성봉(月星峯,) 바랑산, 곰티재(熊峙), 깃대봉, 함박봉, 천호봉, 천마산, 계룡산, 부여 부소산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의 중간쯤에 있는 산으로 동 북 서쪽은 충남, 남쪽은 전북의 도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능선 "말똥재" 벌곡면 수락리쪽 산벌판에 9.28 이후 패주 북상하던 인민군들이 대전 금강전선에서 퇴로가 차단되자 인근 심산유곡 대둔산으로 잠입했기 때문에 약 2만 여명이 넘는 인민군 패잔병과 지역입산 공비(共匪)들이 모여들어 이를 소탕하는데 휴전 후 1956년도 까지 격렬한 작전을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둔산 지역의 공비는 지리산, 덕유산 등지에 거점을 둔 남부군사령관 이현상(금산군 출신) 휘하에 소속되어 한때는 자칭 남한 빨치산 총책 남출열 등을 비롯하여 소위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38선, 한듬산(대둔산) 부대장 등 거물급 공비들이 총 집결하기도 하였다 

 

2. 6.25동란 전의 일반적 사회상과 6. 25의 발발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한 해는 1941년 4월 1일이었다. 그 당시 왜정 식민지 치하이지만 무언가 새로운 신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교육의 열기가 일어 100명 가까이 전형을 보아 60명이 입학하였으나 해방이 되자 마을에서 한일 합방 이전 구시대적 한문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둔 사람이 20명, 나머지 3분지 2인 40명이 졸업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평균나이가 2~6세가 많았다. 

학제 변경으로 1950년 6월 1일 2학년에 진학한 1950년 6.25 일요일날 오후 3시 반경 요란하게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군 트럭이 군인들을 싣고 대전역으로 계속 질주했다. 

주방일을 돕던 아줌마가 '학생'하고 나를 부르더니 "아까 사이렌소리가 났잖아, 지금 우리 아들이 다녀갔는데 전쟁이 터졌대" 하면서 매우 근심어린 표정으로 제발 무사했으면 하고 손을 모아 비는 것이었다. 이튿날 학교에 갔으나 어수선하여 공부도 되지 않았다. 다음날 화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전교생을 집합시키더니 김영훈(추후 초대 서울시교육감) 당시 교장선생님이 북한군이 전쟁을 도발하여 수업을 계속 할 수 없어 휴업을 하게 되었으니 모두 집에 돌아가서 별도연락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거리로 나와 대전역 길을 걸어오는데 등교시까지 보지 못하던 승용차가 많아서 차도를 길을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6월 28일 서울에서 내려오신 외사촌 형님과 중학교 5학년인 친형과 같이 호남선 철로를 60리 이상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그 이후 인공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 당시 참호     © 논산계룡신문



3. 암울했던 인공시절

 

그런데 몇달 안되는 북괴점령 인공 시절을 겪어보고 나서야 그렇게 너도 나도 공산주의를 찬양하던 사람들도 완전히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종속이론에 근거한 반제국주의 사조가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던 1970·80년대 이전까지는 과거에 열렬하던 공산주의자 까지도 완전히 공산주의 사상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은 완전히 반공사상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그런 공산체제의 현장을 경험한 다음 몇가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가. 인민군 탱크 대열의 행렬 

 

연산에서 금산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인 신작로를 따라 연산 황룡재를 넘어 진산 경유 남진하는 북한군 탱크 부대였다. 아마도 부락민 전부가 대환영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듯했으나 누구 하나 반기는 기색 없이 특히 젊은이는 없고 대부분 부녀자들만 나온 부락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쥐죽은듯 조용히 있자 한 병사가 탱크위에서 "여러분 여기 국방군 간나새끼 없이요? 우리는 여러분 해방시키러 왔시오"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걸어왔다. "없어요".하고 대답하자 "간나새끼 있으문 왜 우리 농군하는식 있지요, 솔갱이 낫으로 도리치는 식으로 목아지를 내려 치시라요" 하며 노래를 부르고 만세를 불렀다. 섬뜻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탱크가 20여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 강제 주민 통합 

 

       (1) 시도 때도 없는 동원

제일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불러대는 것이었다. 한가지 지시사항이 있으면 즉시 부락에 "징"을 쳐 주민을 모아놓고 교육을 하거나 지시사항을 전달하니 하루 동안 최소 5회 이상은 소집이 되었다. 거기에다 야간에는 앞으로는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위 세계가 와서 모두 잘살고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교육을 귀가 닳도록 시키는 것이었다. 

 

       (2) 주체의식 상실의 집체교육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자원이 많고 스탈린 대원수가 최고의 영웅이고 공산주위가 최고라는 내용의 교육을 그것도 사람이 바뀌어도 똑같은 내용의 교육을 했다. 노래도 스탈린 대원수의 노래, 김일성장군 노래, 적기가, 기타 공산혁명에 관한 노래 등을 교육하면서 여자 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자본주의 노래를 부르면 안된다며 당시 항간에 가장 유행했던 현인의 "신라의 달밤"을 부르면 반동이라고 했다. 

 

   다. 공포분위기 조성과 인민재판

 

이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은 있으나 보호의 대상은 없었다. 자분주의자는 인민의 적이므로 타도의 대상이라는 것을 누누이 주입시켰다. 나도 국민을 괴롭히는 미군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화 벽보를 그리라고 하여 수도 없이 그렸다가 버리기를 반복했다. 이런 벽보가 면사무소 부근 담벽을 도배를 했다.

소위 인공시절 가장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매일 하루가 멀다고 인근○○면 전 지주 ○○○이 멍석말이로 죽었다네, ○○군 ○○면 유지 ○○○은 인민재판을 받고 대창으로 살해당했다는 등의 소식이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 이런 소식이 구두로 전파되어 불안을 가중시켰다. 신학문 초등학교 6년이상 졸업자,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주, 쌀 3가마니를 주고 농사관리자를 둔 사람들은 언제 불려가서 소위 인민재판을 받고 무슨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내가 피난을 간 종조부께서도 소위 신지식인으로 이장을 하고 해방 후 정부수립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40일 간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분이었다.

 

   라. 참호의 구축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부락민을 총동원하여 도로(당시는 신작로라고 함)를 따라 산 5부 능선에 호를 파라고 하여 주민들이 총동원되어 며칠 동안 깊이 1m정도의 호를 파 놓았다. 나중에 보니 이것은 낙동강 전전에서 후퇴하게 되면 도로를 따라 진군하는 국군과 교전을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한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도주했지만. 이 흔적은 1960년대 이후에 자연 소멸되었다.

 

   마. 벼 나락과 수수 낱알세기

 

조세의 정확을 기한다는 명분으로 벼나락과 수수목을 뽑아다가 한 줄기에 몇알 열매가 맺었는지 세어 소출을 산출하라고 들볶는 바람에 마을사람들이 하루종일 나락 이삭과 수수 낱알을 세느라 밤을 새웠다. 왜정 식민치하에서도 벼소득에 대한 공출은 있었어도 수수, 고구마, 조 등에 대한 공출은 없었다며 불만이 고조됐다.

  

   바. 적 치하에서의 UN군 첩보대의 암약

 

미군 제트기는 하루도 그치지 않고 공중을 날아다녔고 밤낮 비행기가 떴다 하면 반드시 그 인근 산속에서 탁구공 같은 빨간 신호탄이 3개가 지상에서 올라갔다가 일정한 방향으로 떨어지는데 그러면 그 방향에 폭탄이 투하되든가 기총사격이 내려진다. 누가 산속에 있기에 그런 신호탄을 소리없이 쏘아 올리는지 수복 후에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바로 대둔산 자락에서 낙하산만 1개 발견한 것 외에는 내용이 밝혀진 것은 없다.

  

   사. 충남도청과 대전경찰서 건물의 보전

 

대전은 지금 신도시같이 국내 유일의 계획도시로 출발하여 정(井)자형 도로의 신도시였다. 시내의 주택이나 건축물은 관공서나 학교 등 거의 소실되고 온전한 것이 없었는데 유독 도청과 경찰서 두 건물은 피해를 입지 않고 도청은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인공시절 들은 이야기로는 금강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군들을 대전 경찰서유치장과 충남도청에 수감해 놓고 있다가  미군 비행기가 날아오기만 하면 이들을 옥상으로 올려보내 손을 흔들어 폭격을 저지하는데 활용했다고 한다, 수복이 가까워졌을 무렵 미 제트기와 헬기가 날아와서 옥상에 있는 미군을 모두 싣고 가는 웃지 못할 현상도 있었다.

 

   아. 대전교도소 우익인사 잔인한 학살

 

지금 대전 목동 아파트 단지는 대전 교도소가 있던 자리이다. 그 당시 중학교를 다니는 자들의 가정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기 때문에 부모 형제 친척들이 소위 반동분자로 몰려 많은 사람들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후퇴 시 총 실탄이 아깝다며(아니면 인원이 많아 실탄 부족) 교도소 수용자들을 산채로 묶어 대형 우물에 집어던져 살해당한 피해 유족의 사체를 찾아가는 과정이 전부 너무 리얼하게 공개되었기 때문에 대전 시민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자. 우리동리 이은섭 국군 낙오자 살해 미수    

 

우리나라 군인은 해방과 더불어 국방경비대라는 이름으로 군이 창설되었다. 우리 동리에서는 이은섭이 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해서 6.25 당시 전방에서 적의 탱크부대에 밀려 후퇴하는 과정에서 부대가 흐터지는 바람에 낙동강 전선으로 걸어서 내려갔으나 인민군이 낙동강 강북에 진을 치고 있어 접근을 못하고 민간으로 위장 몇달 후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인공에 부역하던 자들이 도주하기 직전 이 사실을 알고 이 상등병을 사살하려 연행하는 과정에서 그의 모친이 낌새를 차리고 얼른 밥을 한 그릇 싸가지고 쫓아가서 막 살해하려는 현장에서 밥을 주면서 사정을 하고 울면서 총을 붙잡고 애걸복걸하는 사이 산골짜기로 도주하여 죽음을 면했다. 그는 수복 후 원대 복귀하여 상사로 무사히 제대까지 하였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군인, 경찰관, 우익인사, 유지 등을 살생부를 만들어 살해하고 입산 공비가 된 것이다. 

 

   차. 후퇴 인민군들의 잠입

 

인공치하에 염증을 느끼고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떨며 "이놈의 세상 빨리 끝나야 될 텐데"라는 주민의 공감대가 극에 달했을 때 추석명절이 지나고 얼마 후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 마을사람들의 안면에 희색이 돌고 발거름이 가벼워지자 이내 곳 연산에서 황룡재를 넘어 인민군 패잔병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따콩총, 구구식총, 다발총 등을 메고 절룩거리는 자 농구화가 없어 짚신을 신은 자까지 누런 인민군복을 입은 채 도로를 꽉 메우며 걸어와 우리 감나무 밑 그늘에 줄줄이 앉아 쉬면서 물을 얻어먹고는 다시 걸어가기를 하루 종일 계속하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 탱크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갈 때 당당하던 기개는 싹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슬금슬금 접근을 피했다. 이들은 낙동강 전전에서 후퇴하다가 금강 방어선에서 북상 루트가 봉쇄되자 인근 가장 험준한 대둔산으로 들어온 것이다.  

 

▲ 전방 철원 백마고지 전투에 버금가는 정도의 전적지 임에도 달랑 목판 표지판 1개     © 논산계룡신문

 

▲ 최근 양촌면에서 설치한 비 영구 전전 표시판     © 논산계룡신문



4. 2만여명 공비들의 인민공화국 세상 대둔산

 

패잔병들은 연 3일간을 계속 하루 수천명씩 도보로 걸어 들어 와 대둔산은 만원이었다. 

수락리 말동재 평원에 천막을 치고 도내에서 입산한 자들이 모여 충청남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여기에 기 잠입한 패잔병들이 모여 2만여명이 이곳에 진을 치고 아직도 인민공화국의 혁명투사라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이야 말로 아직 해방되지 않은 인민공화국이었다. 여기 모인자 들은 ①첫째는 인민군 패잔병, ②인공시절 악질부역을 하여 용서받을 수없는 자, ③앞으로는 스탈린이 이끄는 공산주위 세상이 온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후에 한턱 해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야심가, ④초기 농촌에서 양식을 짊어지고 거점까지 갔다가 돌려보내 주지 않은 자, ⑤부락에 내려와서 먹을 것을 약탈해 부락 젊은이들에게 짊머지게 하여 끌고 온 후 곧 해방된다는 감언이설에 적극 협력하게 된 자도 있고 ⑥초기 벼를 짊어지고 끌려갔다가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고 총살하는 현장을 보고 협력한 자 등이다. 

이들 중에는 야간에 작전 중 그들의 눈을 피해 도주해 나온 자도 있었다. 그래서 젊은 청년들은 밤만 되면 몸을 숨기고 부녀자들만 있는 동내에서 쌀이 없다고 하자 집안을 땅속까지 쇠꼬챙이로 마구 찔러 쌀을 찾아 약탈해 가기도 했다. 비농가로 쌀이 없다고 하면 옷이나 생활용품이라도 마구 들춰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다.

 

5. 경찰공비토벌 작전

 

10월 하순 충청남도 경찰국에서는 전투경찰대를 편성하여 대둔산 지구 공비토벌이 시작되었고 주민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공비소탕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가. 주민소개

 

10월 중순 면에서 내일 경찰이 진주한다면서 특이 젊은이들은 위험하니 연산면 밖으로 나가 몇일 기다렸다가 수복이 완료되면 돌아오라는 전갈이 왔다. 집에는 어머니 홀로 남으시고 우리 형제와 안칠선 씨 3명이 연산면 고정리 친지댁으로 식량 쌀을 자루에 메고 피난을 갔다. 안칠선씨는 익일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형제는 논산시 채운면 화정리에 거주하시는 종조부댁으로 다시 피난을 갔습니다.

형과 둘이 걸어가는 길 동네마다 넓은 도로 한가운데에 새끼줄을 쳐놓고 통행하는 사람을 마을 청년들이 흰 완장을 차고 검문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기저기 공비들이 도망을 나오다가 붙잡히는 사례가 많았었다. 

 

   나. 충남도경찰국 전투경찰대 

 

충남 도경에서는 홍인출 경감을 전투경찰대장으로 임명하여 공비 소탕 작전을 대대적으로 개시했다. 약 1개 대대병력을 투입하여 주간에는 공비들의 거점에서 먼 지역부터 수색해가며 압박하는 작전을 계속하였고, 야간에는 공비들이 외지 습격을 위한 이동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부락에서 목지키기를 하다가 어느정도 저들의 위세를 꺾은 후에는 월성고지에 호를 구축하고 벌곡지서 양촌지서 연산지서 기타 원거리 원정 습격할 수 없도록 목배치를 하여 이동 경로를 차단하였다. 

경찰이 입성하기 전에는 공공연하게 주야 총을 메고 와서 쌀을 약탈해 갔으나 경찰이 정착한 후에는 이들도 방법을 달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월성고지 목배치로 이동 경로를 차단하자 이들은 아주 많은 수의 공비들이 월성고지 인근에 와서 먼저 총을 쏘아 아군의 방어태세를 점검하고 경찰병력의 야간 이동을 제한하기 위해 밤새 초저녁부터 총을 쏘면서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는 월성고지 밑에 2~3부 능선을 타고 덕곡리, 검천리, 대덕리, 사정리, 만목리 등지 인접부락의 앞산에 와서 미리 21:00경부터 총을 쏘아 부락 어떤 곳에 방어병력이 배치돼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사이 12시 가까이 되면 배치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을 골라  양식을 약탈해 가는 수법으로 변했다. 그리고 때론 원거리까지 원정습격을 하였다.  

사실 대둔산 공비와의 전쟁은 월성고지 전투가 최고조였다. 초기 배치시는 워낙 많은 공비가 몰려들어 고지를 빼았기기를 수회 하면서 점점 강화해 사수는 했지만 대둔산 공비토벌에서의 아군 희생은 이 곳에서의 사상이 가장 많았다.  그 곳에서 사망자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초기에는 매일 희생자를 실어 나르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적어도 이 월성고지 만은 그런 애달픈 사연의 역사 증표가 반드시 세워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다. 강경경찰서와 지서 등 습격

 

그때 당시 마을에서 유일하게 청년들이 모이는 2칸짜리 큰 사랑방이 있는 우리 집은 공비토벌  지휘부가 되어 도산리로 지휘부를 옮기기 전까지 토벌대들의 숙식 및 작전 본부가 되었다. 이런 소식은 내가 피란을 와 있는 채운면 종조부 댁까지 들려 왔다.

전열을 가다듬은 공비들은 여세를 몰아 3개 작전 단위로 나누어 1개 부대는 강경경찰서를, 나머지는 연산지서와 벌곡지서를 동시에 습격하여 연산과 벌곡지서는 불태웠으나 경찰서는 단단히 사전 대비를 했기 때문에 큰 피해 없이 밤새 작전을 하고 퇴각시켰다. 

내가 피난 와 있던 종조부댁은 대둔산에서 약 20km 이상 떨어져 있는 강경경찰서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경찰서 습격을 하기 2일전에는 역시 그 지역에서 입산한 자등이 사전 통보하여 경찰서 습격을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종조부와 함께 다시 채운면 지서가 있는 마을로 피난을 갔다. 물론 경찰과 주민들이 총 동원되어 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 날은 탈 없이 넘어갔으나 종조부 댁으로 돌아온 그 다음날 경찰서를 습격해왔다. 종조부댁은 논산 강경 들 평야 한 복판에 약 10m 정도 언덕이 있는 곳에 부락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강경시내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아직 벼를 수확하지 않은 시기였는데 누렇게 익은 잔잔한 벼 이삭 위로 예광탄이 빨간 빛을 내면서 공중에 날아다녔다. 전투는 9시경 초저녁에 시작하여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총격소리는 콩 볶는 소리 같았다. 그 경황 중에도 공비들을 응원하는 여자 집단의 노래와 와이샤, 만세소리가 요란스럽게 계속 들렸다. 

이날 전투에서 연산면 의용소장대장 김헌수 대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분은 종조부와 연산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우였다. 

그로부터 수일 후 벌곡면도 토벌대가 완전히 정착하여 치안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으니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드디어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왔다. 돌아오는 길은 논산읍을 경유하여 부적면 연산면을 경유 황룡재를 넘어 오후 5시경 벌곡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부적면을 경유하는데 어느덧 나락은 거의 베어서 단을 묶어 논두럭에 세워 말리는 볏다발이 군데군데 있을 뿐 추수가 끝난 상황이었다. 

떠날 때와는 달리 벌곡지서는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고 면사무소는 그대로 존재했는데 면사무소 바로 옆 논 가운데 2층 토치카를 세우고 사람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초등학교 선배 한 사람이 형 이름을 부르면서 "어 민수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지금 학교에 가면 학생들 전부 모여 있으니 빨리 학교 교장관사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 날부터 학도의용경찰로 참여를 하는데 초등학교 3년 선배인 김용기씨가 "자네는 어머니와 3식구뿐인데 형제가 여기 다 있으면 걱정 하실테니 연수 너는 집에 가서 자위대로 부락을 지키라“고 했다.

 

   라. 공비 소탕 "지역대책위원회" 설립 작전지원

 

1950년 10월 경 덕곡리 토벌대는 효과적인 공비 소탕 작전 등을 위해 "벌곡면지역대책위원회(이하 對策委)"를 조직하고 우선 경찰 인력만으로는 소재지 시설조차 방어할 수 없으므로  ① 소재지 주변 청년과 중학교 학생 동원 경찰 방어 작전 보조, ② 각 부락 단위 청년 동원 자체 부락 수비, ③ 경찰 작전에 필요한 물적 자원 지원, ④ 기타 필요 정보제공 및 입산공비 선무공작, 주민 계몽 등 경찰작전에 적극 지원키로 결정하였고, 전 주민은 적극 호응하여 경찰과 전 면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공비를 완전히 소탕할 때까지 계속 역할을 하였다.

이때 면 대책위원장에는 대전에서 경찰간부로 계신 안상학씨(차후 고양경찰서장)의 친형인 안상봉(안정 후 벌곡면장)씨, 대책위원은 각 리 유지분 들이었고, 특히 이런 대책위 설립과 기능 등에 관한 방안의 기획 실무작업을 하신 분은 이조 통정대부의 손자이며 지역사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지역 리더이신 사정리 거주 정종채씨와 이웃 대덕리 거주 임희재 부면장이 실무책임을 지고 진행했다.    

당시 전투경찰대 지원 보조에 나선 인력은 "의용경찰대"와 "학도의용대", 각 "부락의 청년 자위대"들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당시 대둔산 공비 소탕전투지역은 논산시 일대와 대전시 일부, 공주시 일원, 그리고 금산군 주변 일대와 전북 운주면 일대 등 이었으나 가장 핵심지역은 역시 벌곡면이었다. 

 

   마. 전투경찰 지원 작전요소

 

       (1) 벌곡 의용경찰대(義勇警察隊) 

벌곡면의용경찰대는 최초 벌곡면 사정리 거주 전직 경찰관 출신 이광하를 중대장으로 하는  "의용경찰대" 1개 중대를 편성하여 야간에는 소재지 경비와 경찰 주둔지 시설 방호를 위한 경계근무를 담당하고 주간에는 경찰작전에 직접 참여 지원하거나 산악 수색 등을 하였다. 이 부대는 차후 김희동이 소대장이 되어 민방위군으로 개편되었다. 작전에 동원되어 전투를 하는 때나 각 부락을 지키는 일, 무기 탄약 등을 관리하는 것 등은 경찰의 감독을 받았기 떼문에 큰 사고는 없었다. 

 

       (2) 도산리 의용경찰대

도산리에 경찰 토벌대 본부를 옮기고 월성고지에 고정 목배치를 하고 매일 전투를 하게 되자 경찰병력만 가지고는 인력이 부족함에 면소재지 외에 도산리에도 별도의 의용경찰대 1개 소대를 상주 조직하여 경찰의 야간전투 및 주간 산악 수색 등 작전을 지원하였다. 여기 의용경찰대는 도산리 주둔 토벌대장 최인출 경감의 지휘하여 작전을 하였고 소대장에는 수락리 거주 윤종식 씨였다. 이들은 주간 공비 출현 신고를 받고 금산군 남이면지역, 대전시 장태산 지역까지 출동하는 사례가 있었다. 

 

       (3) 학도의용대(學徒義勇隊) 

6.25전 중학교에서는 군사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대책위는 학생들이야말로 전투 잠재력이 있다고 보고 경찰작전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중학교 재학생뿐만 아니라 벌곡초등학교 6년을 졸업하고 중등학교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자 등으로  "학도의용대(學徒義勇隊)"는 32명이 참여했다.     

대장은 성균관대학 1학년 재학 중인 구상회씨였다. 구 대장은 벌곡초등학교 출신으로 졸업 후 채운면으로 이사했으나 위험지구인 벌곡에 와서 학도의용경찰대를 창설 지휘했다. 

신학기가 도래하여 학도의용대가 해체됨에 따라 이들은 대전 시내에 신설되는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이들 학생들은 52년도부터 마을 청년들은 군에 징집이 되는 바람에 부락 방어를 하던 부락 자위대 요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선 작전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공휴일이나 방학 때 집에 오는 날에는 부락자위대원으로 주거지 방호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부락자위대(部落自衛隊) 

부락 자위대는 각 부락에서 자체적으로 자금을 만들어 무기를 구입하여 자기부락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총체적으로 지서의 감독을 받았으나 각 이장이 자체적으로 책임을 지고 운영했습니다. 우리 부락 사정리 1구는 이장이 무기를 구입하고 매일 밤에는 마을 청년들이 교대하면서 새벽 4시까지 경계 입초를 섰습니다. 

우리 마을도 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하여 칼빈소총 3~4정, 갈빈M2 1정, 다발총(쏘련제) 1정,  M1소총, 구식소총 등 약 15정을 대전시내 무기거래소에서 구입했고 마을 젊은이들이 저의 집 사랑방 나무 상자를 무기고로 사용하였다.  

입초 근무는 저녁이면 우리집 마당에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무기를 수입하고 암호는 매일 지서로부터 전달이 와서 전파하였고, 최초에는 우리부락 방호책임자인 정종채씨가 배치 장소와 요령등을 지시하였고 차츰 자전체제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부락 방위 본부가 우리 집이기 때문에 우리 부락 방호를 책임 진 정종채씨는 이 전투가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매일 밤 우리집에 출근 밤 12시가 지나 사격 등이 끝이면 돌아가곤 했습니다. 

저의 부락 사정리 1구는 남향 부락이었는데 부락 앞으로 동서로 활같이 둥글게 도로가 나 있고 그 약 20m 전방에는 역시 동에서 서로 향한 하천(갑천 상류)  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하천 바로 건너편은 앞산입니다. 공비가 우리 마을로 접근하려면 앞산 능선에서 똑바로 내려와  우리집 앞 빨래터 길로 와야 하기 때문에 가장 적의 접근을 감시하기에 좋고 특히 모퉁이 담장 바로 옆으로 호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적으로부터 아방을 은폐하는데 가장 적합함으로 우리집이 경계근무의 중심지(제1초소) 이었고 부락 제일 아래 쪽 송인섭 집과 제일 위쪽 박상하네 집도 초소로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바. 공비들의 침투 및 작전 태양

 

후기 피검공비 남정우는 18세의 중학 3년생으로 친형과 함께 입산하여 책임자 비서격으로 있을 당시 작전 지시하는 것을 보아서 알고 있다면서 본인이 "왜 매일 우리 앞산에 와서 총을 쏘았느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증언을 해준 바가 있습니다.

 

       (1) 초기 처참했던 월성고지의 전투

월성고지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는 초기 현장을 다녀온 다음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같은 마을 거주하는 초등학교 3년 선배로서 년령은 나보다 5년 년상의 정찬목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 선배는 해방직전 1945년 3월 벌곡초등학교 6년을 졸업한 몇분 안 되는 신교육 이수자였다. 전날 야간 월성고지에 몇 명이 배치되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그 고지를 완전히 점령당하고 배치되었던 경찰관들이 거의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한분이 생존했는데 너무 많은 공비가 총을 쏘며 몰려들어 육박전을 하는 도중 중과부족으로 능선으로는 피할 수가 없어 월성고지의 특성상 능선 서쪽은 양촌면인데 약 100m이상되는 완전 수직 암벽이기 때문에 이 절벽 밑으로 2명이 뛰어내렸는데 한분은 바닥으로 떨어져 순직하고 한분만 절벽 바위틈에 꼬불꼬불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지위에 걸려 얹혀 실신하고 있다가 새벽 일찍 구조대 들이 오는 바람에 살아났다는 증언을 해 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며 그 절벽을 보고 싶어 갈 때 마다 보려고 시도했지만 절벽이 너무 아찔하여 내려다 볼 수가 없어 항상 같이 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곤 할 뿐이다. 대둔산 지구에서 가장 많은 아군의 희생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이런 참혹한 현장이 과연 전국적으로 얼마나 있겠는가 하면서 영구히 멸실되지 않는 이런 사실들을 설명하는 시설물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2) 매일 월성고지(경찰의 차단 목배치 장소) 습격

이후 전 경찰 병력을 월성 고지에 집중 투입케 하여 병력을 고착화 시키고 공비들이 원거리까지 진출하여 오늘은 대전방면, 내일은 금산방면 같은 날도 이곳저곳 관공서 등을 습격 공비의 수가 많다는 것을 과시하며 공포에 떨게 하고 먹을 것과 의약품 생필품 등을 약탈해 갔다. 

 

       (3) 매일 벌곡면 수상 부락 앞산에서 밤 9시부터 12시까지 총격

각 부락 마다 다발총 소리를 내기 위해 단발총을 3~~4발 연발 탕탕탕탕 쏘고 딱콩 총을 쏘아 당시 기관총의 위력을 갖춘 다발총이 있는 양 과시하고 공비 인력이 많은 양 위장 공포에 떨게 하고 대응사격을 하는 것을 보고 어디에 잠복자가 있는가를 확인하여 부락 자위대 배치 장소 피하면서 식량 등을 약탈하기 위해서 앞산에서 총을 쐈다고 했다. 이 총격은 2년 이상 계속되었었다. 

 

   사. 연산지서 13회 습격과 김용언 대장 전사  

 

벌곡면에는 도산리에 전투경찰 작전본부가 있고 면소재지에는 토치카에 지서 직원과 면의용경찰대, 학도의용대가 철옹성같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야간 습격을 모면하였으나 주간에 평화가 확보된 인근 연산지서는 최초 김헌수 의용소방대장이 전사한 이후에도 13회나 지서가 습격을 받는 고통을 겪었다.  공비들은 전투경찰대를 월성고지에 고착시켜 놓고 일부 공비들이 2부 능선을 타고 나와 각 부락 앞에서 총질을 해 또 작전부대를 고착시키고 일부는 연산까지 원정 지서를 습격하는 식으로 기타 인근 면 대전 인근까지 출몰하여 식량과 생필품 등을 약탈해 갔다. 연산면 지서의 마지막 습격은 1953년 3월 20일 이었고 연산면 대한청년단장 김용언씨가 애석하게 이날 순직을 하였다. 

  

   아. 곰티재(熊峙) 야간경비 후 귀가 청년 피살

 

월성고지에서는 매일밤 밤샘 전투를 하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소요되었고 해지기 전에 인근부락에서 청년들이 동원되어 교대근무를 하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대덕리 1구 거주 백낙길, 도덕희, 도경희, 이기식, 이두용 등 5명이 야간근무를 마치고 식전 귀가하는 도중 콤티재 부근에서 잠복하고 있던 공비들이 비무장인 이들을 붙잡아 소나무에 산채로 묶어놓고 밑에다 나뭇가지를 싸놓고 불을 질러 산채로 소사시킨 사실이 있어 이후로는 무장으로 오가게 되었다. 죽으면서 요동을 친 흔적으로 보아 산채로 소사 시킨 것이 확실했다. 아직도 그의 유족들 일부가 현재 그 동리에서 거주하고 있다. 

 

   자. 중지리 토굴 은거공비 검거

 

중지리(덕곡리) 자위대 의용경찰 김기태, 권오성 등은 자기네 동리 계곡 이창구 씨 밭 가운데에 서 이상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쫓아가 공비들이 토굴을 파고 그 토굴 속에 은신하고 있는 공비 6명을 발견 검거 실적을 올린 적도 있었다.

 

   차. 마지막 공비 소탕

 

대둔산에서의 마지막 공비토벌은 1956년 정월이었다. 정월 보름 전날 심야 12시 넘어 수락계곡에서 매복조가 잠복하고 있는데 자박 자박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시커멓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매복자 이재락씨가 칼빈총 발사하자 비호같이 도주 해 버렸다. 날이 훤해질 때를 기다려 현장을 살펴보니 칼빈 손목잡이가 총에 맞아 부러져 땅에 떨어져 있고 피를 흘리면서 도주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옆구리를 관통했음이 확실하다고 보고 주간에 대원들과 같이 수색하였으나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부상을 당한 그 공비는 익일 낮에 수락리로 나와 검거됨으로써 마지막 야간 인력배치를 끝내게 된 것이다. 이재락 씨는 경찰관에 특채되어 최종 경위까지 특진하고 최종적으로 공비를 검거한 것이다. 

 

   카. 보조경찰력 지휘 감독

 

이때 대둔산 지역 공비토벌 총책임자는 홍인출 경감이었고, 벌곡 지서 주임은 지역 "의용경찰대"와 "학도의용경찰대" 등을 감독하였습니다. 당시 그 홍인출 경감 이름은 초등학생까지도 모르는 자가 없었고, 본인이 경찰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절대적 동기도 아주 훌륭했다는 그 분의 인상이 너무나 깊숙이 내 뇌리 속에 각인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전시는 작전부대장의 지휘를 받았으나 부락 자위대 임무는 지서의 감독을 받아 각 리 단위로 자율적으로 시행했다.  물론 각 부락의 방어용 무기는 대전 군수품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확보하고 무기관리 등만 지서의 감독을 받았다. 

 

   타. 반공포로석방과 대둔산 공비

 

남정우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초기 그 많던 공비 일부는 태백산 준령을 넘어 월북했거나  일부는 논산훈련소에 포로로 투항하지 않았냐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초기 인민군의 수자가 굉장히 많았는데 산속에서 노숙하던 인민군들은 자고 나면 많은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많던 인민군이 왜 이렇게 점점 줄어드느냐고 주변 공비들에게 물어본바 더 큰 산 덕유산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천막 안에서 자기네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렇게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이 지방 출신 공비들은 다 집에 연락하여 양식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제는 온 동네가 다 무기를 가지고 방어를 해 더 이상 구하기도 힘드니 이대로 굶어 죽을 수도 없지 않느냐면서 정식으로 군부대에 가서 자수를 하고 포로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거기서 싸우는 방법을 택해야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가까운 논산에 훈련소 군부대가 있으니 좋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으로 보아 그 당시는 몰랐지만 1953년 6월 18일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측과 상의 없이 27.389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논산군내 모든 부락에는 한 마을당 100여명씩 배당을 받아 약 4개월간 가가호호마다 이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었다. 그때서야 남정우는 산에서 그들이 한 말이 생각이 나서 이들이 대둔산에 은거했던 자 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아마도 그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고 이야기 했다. 포로들이 석방돼 우리 집으로 찾아 들어올 때까지 우리들은 북한군의 포로는 모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있는 것으로만 알았지 논산 훈련소에 그런 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승전탑     © 논산계룡신문



6. 대둔산 지구 전투 전과

 

1950년 9월부터 1956년 1월까지 장장 6년간 적과 조우하여 혈전을 거듭하기 수백회, 전방전선인 38선에는 이미 휴전이 성립되어 포성이 멎은 지 오래 되었어도 후방 지역인 대둔산 지역의 공비토벌 작전은 치열하게 계속 되었고 그 때까지 적사살 2,287명, 생포 1,025명 무기탄약과 장비 등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찰관, 의용경찰 및 애국청소년 등 1,376명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장열하게 산화하는 슬픔을 안겨주었는데. 먼 훗날 무고한 아방의 희생은 차치하고 불문곡직 공비의 사망만 문제시하고 또 문제시 하는 자체를 영웅시 하는 문화는 분명 있어서는 안 되겠다.   

 

김연수 (84세, 1935년생)

논산시 양촌면 신작리에서 태어나 벌곡면 사정리에서 성장

벌곡초등학교, 대전고 졸, 경희대 행정학 석사

인천중부경찰서장, 서울동대문경찰서장, 서울시경 공보담당관

1996년 12월 정년 퇴직 현재)계룡시 금암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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