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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인생박물관] 전필성 계룡시노인회 엄사분회장
기사입력  2020/11/18 [15:42]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계룡인생박물관] 전필성 계룡시노인회 엄사분회장

무겁던 연탄재 다 치워내고 이젠 지족지부

 

전필성(全弼聖. 78세) 회장은 70대 후반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운동선수와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 그의 흰머리만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노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는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 또한 편안하고 부드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사는 외모와는 다르게 역경을 이겨낸 고난사이다.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본다.


 

고무신공장 집안에서, 공원으로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예천이다. 예천군 용궁면은 예부터 용궁(龍宮) 전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기도 하다. 그는 그곳에서 대대로 부농인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부친은 면사무소 서기로 있을 정도로 식자였으며, 또한 서울 영등포에서 고무신공장을 할 정도로 넉넉한 집안이었다. 당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고무신은 전 국민의 대표신발이었으니, 그의 가세(家勢)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의 집안도 6·25한국전쟁을 피해갈 재간은 없었다. 전쟁이 터지자 빨간 완장을 찬 자들이 들이닥쳐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세간을 다 들어내 갔으며, 전쟁의 화마로 서울 영등포의 고무신공장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의 집안은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학교는 중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17살 되던 해에 대구로 나가 공장에 취직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4년을 보내고 그는 군 입대를 하게 된다. 50사단(대구)에서 훈련을 마친 그는 광주77육군병원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근무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운전기술은 먹고 살 수 있는 대단한 기술이었음에도 그때 그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한다.

그래서 1966년도에 제대한 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도시인 서울로 갔다. 그곳에 가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일푼,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그는 노숙을 하며 고생하기 시작했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생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한강다리에 두 번이나 갔다. 그때마다 무언가 가슴에서 불끈 뜨거운 것이 올라오며 삶의 의지를 다시 찾았단다.

 

연애결혼과 목재소사업 흥망성쇠

 

그는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의 소개로 ‘태화고무’라는 고무신공장에 취업을 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4년 간 일을 했다. 그리고 70년도에 지금의 아내인 이정자 여사를 만나 5~6개월 연애를 하다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연애결혼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고 아내는 19세였다. 물론 교향인 예천에서 식은 올렸지만 그들은 서울 천호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태화고무에서 목재소로 직장을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영업을 했다. 그 목재소의 사장이 그를 아주 좋게 보았다. 매사 근면성실하고 정직한 그였기에 사장은 그를 신임했다. 그러다 그 사장이 목재소를 정리하게 되었는데 “이왕이면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 하여서, 목재소를 인수하게 되었다. 그때가 1975년도였다.

목재소 사업은 잘 되었다. 조금씩 돈도 들어오고 그 돈을 모으게 되었다. 당시 그의 고모부가 부림건설이라는 큰 건설회사 임원으로 있었는데, 그 고모부가 목재를 납품하여 달라고 해서 그 건설사와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돈이 들어오며 경기가 무척 좋았다. 그러다 그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연쇄 부도를 맞게 되었다.

건설사로부터 받을 큰돈을 못 받고 결국 빚잔치를 해야만 했다. 2억이라는 큰돈이었다. 78년도 당시 서울에서 2~3백만 원이면 집 한 채 샀으니, 집을 백 채 정도 살 수 있는 큰돈을 한 번에 날려버린 셈이다. 그는 그렇게 목재소를 정리하고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고, 빈손으로 생면부지 계룡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귀촌후 축산~대전미화원~텃밭

 

먼 친척이 계룡 도곡리에 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산을 관리하고 목장을 해보라” 해서 그는 무작정 식솔들을 끌고 내려왔다. 처음에는 소(육우)를 키웠다. 44마리까지 키웠는데 88년도에 사료 파동이 나면서 정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염소를 키워보았다. 그 또한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것도 곧 정리해야만 했다.

마을에서 이집 저집 농사를 도와주며 살다가 그는 1987년도에 대전 환경미화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늦은 밤 출근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일이었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밤에 대전까지 나가는 교통편이 없어서 큰길까지 나가서 오가는 자가용을 세워 얻어 타고 가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택시를 타고 가기도 했단다. 그러다 오토바이를 한 대 구해 그것으로 통근을 했는데 늦은 밤길 오토바이로 다니는 출퇴근길은 무척 위험했다.그때는 연탄을 때는 시대라 집집마다 나오는 연탄재를 밤새 치워야 했다. 그 무거운 것을 차에 싣는 일은 보통 체력 가지고는 안 되는 벅찬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2년 간 했다.

그러다 계룡시에 출장소가 생기면서 그는 계룡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대전까지 오토바이 타고 출퇴근하는 위험도 사라지고, 무엇보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오후 5시에 퇴근하니 살 것만 같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는 2년 후 환경미화원 반장이 되었다. 그렇게 정년까지 일했으며 13년의 환경미화원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은퇴 후 왕대리에 있는 매립장에서 5년 간 일을 더 했다. 지금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도곡리에서 농사를 조그맣게 지으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폐결핵 넘게 해준 신앙의 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았고 운동도 무척 잘했다. 특히 달리기를 잘해서 중학교 때는 육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단거리 선수로 도대회에 나갈 정도의 실력이었는데, 그는 100m를 12초대에 뛰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목재소 사업을 하던 때인 34살 때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서 폐결핵 3기 진단을 받고 힘든 투병생활을 해야만 했다. 목재소 사업을 막 시작하던 때인지라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어 사업하랴 투병하랴 이중으로 힘들던 때였다. 그런 이중고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신앙생활이었다.

그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교회를 그는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도곡리에 있는 교회를 나가고 있으며 그 교회의 장로이다. 그의 아내는 권사이며, 모든 가족들이 교인이라고 들려준다. 

“인생의 큰 고비 때마다 자신을 지켜주고 일으켜준 것이 신앙”이었으며 “항상 넉넉하지 않더라고 부족하지 않게 채워준 것 역시 신앙의 힘”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덕분에 네 아들 모두 어려움 속에서도 잘 자라주었다. “지금은 모두 일가를 이루고 각자 처한 곳에서 잘 살고 있는 것 역시 신앙의 덕분”이라고, 겸손한 자랑을 이어간다.

 

 

남은 인생, 웃음과 봉사로 

 

그는 2018년도에 계룡노인회 엄사분회 회장이 되었다. 2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그는 독거노인들의 농사일손 돕기, 가사 돕기, 그리고 집수리 등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조심스럽게 돕고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화단가꾸기 등 환경봉사도 하고 있다.

“어려움도 다 겪어보고 한때는 부도 누려보았지요. 지나고 보니 재미있는 한 세상입니다. 이제부터는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달려가서 해야지요.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 남은 인생은 나누고 봉사하며 살렵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조그맣게 농사를 지으며 먹는 것은 자급자족하고 있다. ‘정부에서 용돈 주는 것으로 부족하지 않다’며 ‘오히려 나눌 것이 있어 좋다’고 지족지부(知足知富) 만족감을 드러낸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고, 살고 있는 여기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하는 그의 안면에는 함박웃음 한가득이다. 인고의 세월을 넘어선 그의 편안하고 인자한 웃음이 계룡시에 퍼져나가고 있다, 잔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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