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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인생박물관] 계룡시 경남무궁화아파트 임말숙 어르신
기사입력  2020/12/16 [11:29]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계룡인생박물관] 계룡시 경남무궁화아파트 임말숙 어르신

부잣집딸였지만 마이웨이, 스스로 개척해와

“I am cooker of U.S. Navy in KOREA.”

 

임말숙(林末淑, 84세) 어르신은 ‘예쁜 할머니 대회’가 있다면 상위권에 입상할 만큼 고운 모습이다. 대한노인회 계룡시지회에서 만나 뵌 그녀의 짧은 커트 머리는 은회색으로 멋있게 세었다. 팽팽하고 고운 피부에 꼿꼿한 몸매는 80대의 노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기다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 있는 높은 톤의 목소리와 센스는 아직 젊은이의 것이다. 또한 그녀가 살아오고 겪어온 이야기는 색달라 보였다. 

 

 

시집살이 안 시킬 사고무친 남자에게

 

그녀의 고향은 해군사관학교와 벚꽃으로 유명한 경상남도 진해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진해의 인근 도시인 창원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의 가정은 그 어려웠던 시절 12남매를 키웠음에도 전혀 부족함 없는, 넉넉한 살림살이였다. 그런 유복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랐으니, 그녀의 심성은 밝고 곱기만 했다.

그녀는 줄곧 고향집에서 학교를 다니며 자랐다. 그녀에게는 아무 걱정이 없었으며 친구들과 노는 게 그저 즐겁기만 하던 해맑은 소녀시절을 보냈다. 어려움이 없다 보니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 의식도 없었다. 넉넉한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이 그녀에겐 그다지 갈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려고만 마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또 부모님이 보내려는 뜻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보낼 수 있는 집안형편이었지만, 딱히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결혼을 서둘렀다. 부모님의 나이가 점점 들다보니, 어서 막내를 시집보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다. 부모님은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 월남한 실향민 청년을 짝으로 맺어주었다. 그는 남으로 내려와 사고무친(四顧無親)이었으며, 경기도 오산 미군 비행장에서 미군부대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아무 가족도 없는 그를 사위로 들이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언니가 고된 시집살이로 친정에 올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쓰려서, 막내딸이 그런 시집살이를 할까봐 시집이 없는 남자를 사위로 택했던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딸을 시집살이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부모님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부모님이 맺어주는 대로 그와 결혼을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 남편 김익립(金益立, 현 87세)은 그녀보다 세 살 많은 스물셋이었다.

 

 

 

주한 미해군 군사고문단 요리사~ 사업가

 

남편의 직장이 있는 오산에서 그들은 신혼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향수를 달랬다. 그녀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남편은 너무 애처로웠다.

그런데 남편이 그렇게 술을 마시다 보니 다음날 출근을 못하거나 늦는 날이 많았다. 결국 이런 연유로 그는 미군부대를 계속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둘은 그녀의 친정이 있는 진해로 내려오게 되었다.

진해로 내려와서 남편은 직장도 잠시 다녔으나 곧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양계장 사업을 시작했으나 그 또한 곧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향수병이 심해지면 질수록 마시는 그의 주량도 따라서 늘어났다. 그녀는 남편만 믿고 있을 수가 없어서 직접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녀는 지인의 소개로 진해에 있는 주한미해군 군사고문단의 세탁소에 들어가 일을 시작하였다. 다니다보니,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곳이 식당의 요리사였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시험을 봐야 했다. 영어시험은 물론 요리에 대한 필기와 실기시험도 치러야 했다. 그녀는 틈틈이 공부해 그 시험에 모두 합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요리사가 되었다. 커피와 주스, 빵, 에그프라이, 스프 등을 준비하는 아침식사 요리사보다는 풀코스를 해야 하는 점심식사 요리사가 진정한 요리사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를 위한 시험 준비를 했고, 당당히 합격하여 점심식사 요리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요리사가 되어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생활도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5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오랜 세월의 미군부대 요리사를 그만두고는 창원에서 통닭집을 열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다양한 치킨 요리가 없었고,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기름에 튀기어내는 통닭밖에는 없을 때였다.

그녀는 미군부대에서 하던 식으로 닭을 그릴에 굽는 등의 방식으로 해서 당시 그 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많은 돈을 벌었다. 이 사업은 곧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녀는 계룡으로 오기 전까지 김해, 마산, 창원 등지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기도 했다.

 

 

 

아들 하나 잘 키워 해군장교, 효자아들

 

그녀는 남편과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귀한 외동아들이었다. “아들을 잘 키웠다기보다는 아들이 잘 자라주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아들은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속 썩이는 일없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는 항상 모범생이며 우등생으로 부모에게는 물론 학교에서도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이었다.

그녀가 미군부대에서 일을 한창 할 때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아들 아침밥과 점심 도시락 두 개를 싸놓고 출근해야 했다. 그래야만 미군부대 식당에 나가 아침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끝나면 바로 세탁소로 달려가서 오전에 일하고 또 오후에는 미군숙소 침구정리하는 일까지 했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집안정리와 식사준비 등을 하면 밤 11시나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에 3~4시간씩만 자고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때문이었다”고 그녀는 술회한다.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는 착한 아들만 바라보면 그녀는 없던 힘도 솟구쳤단다.

아들은 그런 그녀의 바람대로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며, 현재 해군장교로 복무 중이다. 아들이 사관학교에 간다고 하자 학교 선생님이 “서울대도 충분히 갈 수 있는데 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관학교를 보내느냐?”며 의아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서 그런다”고 대답했단다. 아들은 군복무를 하면서도 서울대에 편입하여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행정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아들과 함께 계룡에 살며 아들 효도를 톡톡히 받고 있다”고 입이 귀에 걸리는 자랑이다. 

 

 

복지관에서 노노케어하며 열혈 수강생

 

평생 술을 벗 삼아 살아온 남편은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그는 69세 되던 해에 뇌경색으로 한 번 쓰러졌다. 이후 허리도 안 좋아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녀는 이런 남편을 위해 2012년도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집에서 남편을 직접 보살폈다.

그러나 이제 나이도 80 중반에 들어서니 체력이 달려서 지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보살피다 보면 같이 안고 넘어지는 위험도 있기에, 올 봄에 남편은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육식을 특히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자주 면회를 가는 상황이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천주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종교가 그녀에게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평생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힘과 용기와 희망을 준 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그녀는 요새도 성당에 나가 이웃돕기 등 봉사를 하고 있다. 경로당에 나가서는 다른 어르신들 식사를 챙겨드리는 등 봉사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특히 그녀가 나가는 경로당은 “몹시 협소하고 환경이 열악해서 어르신들이 몹시 불편해하고 있다”며 “식탁과 의자라도 구비되어 입식으로 바꾸면 어르신들이 좀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 바람이 이루어지길 매일 기도하고 있다.

그녀는 노인복지관에서 실시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건강하고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다. 노래교실, 각종 놀이와 운동 프로그램, 그리고 컴퓨터교육까지 모두 참여하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열심히 생활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이가 들었다고 누군가에게 폐 끼치고 신세지지 않기 위해서란다. 그것은 자식도 마찬가지라며 “내 몸은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생활하고 그 다음은 자식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란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 시종일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며 ‘앞으로 계획이 있는지’ 질문에 그녀는 잠시 망설인다. 이내 “나 자신을 위해 평생 무엇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제 무엇인가를 해보려니 어느덧 팔십이 넘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제를 깐 다음 “이제는 좋은 때를 추억하며 살 나이가 아니겠냐?”고 답한다. ‘어느 때가 가장 좋았는지?’ 묻자 세 가지로 답하였다. “아들이 서울대 합격했을 때, 대령 진급했을 때, 그리고 우리 며느리가 들어왔을 때”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저 아들뿐인가 보다^

 

- 손지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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