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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수의 스케치-8] 전라남도 화순 만연사
허물을 묻고 순백의 새 세상을 열망하며
기사입력  2021/01/14 [11:06] 최종편집    논산계룡신문

[임의수의 스케치-8] 전라남도 화순 만연사

허물을 묻고 순백의 새 세상을 열망하며

▲ 전남 화순 만연사/ 종이에 펜/ 41×50cm     ©

 

 

무등산 자락 남쪽의 화순읍 동구리에 있는 만연사를 찾아갑니다. 화순읍에서 약 2km 떨어진 만연산 구름다리 아래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사찰입니다. 

만연사 하면 경내 배롱나무에 진홍색 연등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특징입니다. 사시사철 연등을 달아 한여름 백일홍이 필 때면 마치 배롱나무 열매들이 여기저기 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많은 사진작가와 등산객들이 대웅전 앞의 배롱나무에 매달린 붉은 연등과 흰 눈의 조화를 사각 프레임 안에 담고자 분주합니다. 한여름에도 사찰 주변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능소화와 배롱나무에 붉게 핀 백일홍에 반해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사찰입니다. 다만 제 작품에는 연등을 생략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눈이 내리니 배롱나무에 매달린 붉은 연등은 하얀 눈과 절집의 목탁 소리가 어우러져 세상의 모든 허물을 녹여내는 듯합니다. 이윽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에 머릿속 모든 잡념도 깨끗이 지워줍니다. 

흰 눈 속으로 구불구불 허물을 벗고 자유롭게 위로 향하는 배롱나무에 눈길이 다시 갑니다. 유연한 자태를 한껏 뽐내면서도 겸손한 만큼만 잔가지로 남아 더 이상 허공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함박눈을 이고 있는 붉은 연등은 주변을 밝게 비추는 눈꽃이 되어 하나하나 피어납니다. 이렇듯 만연사 설경은 감탄과 함께 범종 소리에 마음을 가다듬는 온전한 풍경으로 지친 사람들의 내면을 밝혀줍니다. 

고려 때 만연스님이 한겨울에 이곳을 지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가 잠들었던 자리에만 눈이 녹아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상서롭게 여겨 이곳에 토굴을 짓고 정진하면서 만연사를 세웠다고 전합니다. 현재 만연사는 순천 송광사의 말사로 두 개의 암자를 거느린 어엿한 사찰이지만 근현대사의 몸살을 비켜 가지 못했습니다. 

광주를 지나 화순으로 넘어가는 초입의 너릿재는 지금이야 터널로 뚫려 곧바로 화순 땅에 닿지만,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갯길이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정부군에게 사로잡힌 농민군들이 여기 너릿재에서 무참하게 학살되었고, 1946년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오가는 도중에 미군정 군인들이 비행기와 탱크까지 동원해 총격을 가해 쓰러진 곳이며, 1980년 5월 광주항쟁 때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트럭과 차량에 무차별 총질과 방화로 피난민들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죽임을 당했던 한 많은 고개였습니다. 이런 굴곡진 너릿재를 지나야 화순 땅에 닿으니 만연사로 가는 길은 가볍지만 않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만연사 승려들은 군량미와 부식, 제지 등을 조달해 정부군을 도왔고, 구한말에는 당대 명창들이 이곳을 찾아 창악을 공부하는 장소로 제공되기도 하였습니다. 

1948년 온전한 통일국가를 갈망했던 제주 4‧3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를 투입하게 되었지요. 제 나라 국민을 학살할 수 없어 이를 거부했던 군인들이 여수‧순천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양민까지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들은 지리산의 빨치산 부대와 합류하여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 인민군에 편성되어 화순지역을 장악하며 이곳 만연사를 접수, 전남지역 인민군 대대본부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국내 3대 생산량을 자랑했던 화순탄광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노동조합 결성으로 조직되어 파업으로 맞서자 미군정의 노동자들 탄압은 노골화되었기 때문에 많은 광부들이 이승만 정권에 회의적으로 변해 좌익으로 돌아서게 되며 인민군에 동조하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그 결과 1951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대대적인 국군의 반격과 미군 전투기의 네이팜탄 투하로 화순 만연산과 백아산이 초토화되면서 만연사도 이때 모든 전각이 불타고 맙니다. 물론 이때에도 많은 화순의 민간인들이 인민군을 도왔다 하여 죽임을 당해야 했지요. 결국 화순지역은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끝났음에도 1955년 3월이 돼서야 쌍방의 보복 학살이 끝나게 됩니다. 

1980년 5‧18민주항쟁 역시 화순지역은 비껴갈 수 없었습니다. 아니 화순군민이 있었기에 5‧18은 오히려 이만큼의 사상자로 오롯이 광주 민중항쟁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5월 23일 광주에서 화순으로 향하던 시내버스에 11공수부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주남마을 학살) 이때 17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끔찍하게 사망하게 됩니다. 이렇듯 계엄군의 폭압과 학살에 견디지 못한 광주시민군과 화순군민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화순경찰서와 화순역파출소 무기고를 열고 전남도청으로 나가게 됩니다. 또한 화순탄광의 노동자들은 다이너마이트 2천6백여 상자를 시민군에게 넘겼고, 이 폭약이 전남도청에 들어가자 계엄군들은 광주 외곽으로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화순군 부녀자들 역시 10여 일 동안 화순역 광장과 터미널 장터에서 시민군들에게 나눠줄 주먹밥과 빵 음료수 등을 장만하며 평화로운 대동 세상을 꿈꿔왔던 것입니다. 

만연사 입구는 항쟁 당시 계엄군의 학살 만행에 항거하는 화순군민들이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탈취해 유사시 사용하려 했던 총기 3백여 정을 숨겼던 현장이기도 하였습니다. 

수많은 외세 침략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며 반도 땅 어디인들 핏빛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화순은 그렇기에도 역설적이지만 운주사를 세워 천불천탑을 조성하고자 했던 민중들의 열망이 가득한 땅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눈 덮인 만연사 배롱나무 연등을 다시 보니 세상의 모든 허물을 감추고 순백의 새 세상을, 함께 어우러져 평화로운 이 땅을 가꾸고자 갈망하는 화순군민들의 열망이 보입니다. 아울러 여기 만연사에서 코로나로 피폐화된 일상이 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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