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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초대석] 이용흠 연세대 교수 "논산을 전국단위 ‘건강힐링도시’ 메카로"
기사입력  2021/11/29 [23:13]   논산계룡신문

|특별초대석| 이용흠 연세대 교수(소프트웨어 디지털 헬스케어 융합대학 의공학과)

논산을 전국단위 ‘건강힐링도시’ 메카로

 

입시철이다. 1년쯤 전 노인회 탐방차 상월면 분회를 찾았을 때다. 이기창 분회장님과 인터뷰 말미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녀분들 이야기가 나왔다. “한 아들이 연세대 교수로 있다”고 해서 내심 놀랐다. “아니, 시골에서 SKY 가기도 힘든데, 거기 교수까지?”

그리곤 까마득 잊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참여정부 시절 성광원 법제처장과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자라고 공부한 곳이 산성리라고 하여서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산성리는 방송을 탔다. 이상용이 진행하는 TJB  “촌거동락 프로젝트-여기가 대한민국”에서 마을 최고령 101세 어르신 윤정구 님을 모시고 사는 이기창 김사중 부부는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삼시세끼 새로 한 밥만 봉양받던 할머니는 올해 영면하셨고, 논산한글대학 최장수였던 할머니가 떠난 산성리에는 ‘도랑살리기’ 현수막이 펄럭인다. 

 

▲ 연세대학교 소프트웨어 디지털 헬스케어 융합대학 의공학과 교수 이용흠     ©

 

조부모님, 그리고 부모님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102세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잘 살 수 있었습니다. 늘 말씀하시길.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열심히 살다보면 이를 극복하여 잘 살수 있다는 말씀으로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자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제가 가장 존경합니다.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그늘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큰 가르침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상월에서 부모님 이름만으로도 제가 정의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장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들에게 가장 큰 스승이 될 수 있음은 내 부모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반농담 반진담인데요, 지금이라도 고향에 내려가 “누구네집 아들입니다”라고 하면서 부모님 함자 팔면서 상월면 조합장이나 면장으로 출마하면 당선될 것 같습니다요^

 

 

▲ 나의 정신적 지주 부모님     ©

 

▲ 부모님과 할머니 모시고, 관촉사에서     ©

 

▲ 나의 생가 초가집 모습(1974년) : 마루에 서있는 내모습과 대문옆 할머니     ©

 

 

▲ 어려웠던 시절, 4남매 사진     ©

 

선거 그리 만만치 않을 겁니다. 초등 반장 선거부터요^ 어렸을 때 생각나는 이야기 한두 가지 들려주세요. 

 

[엄마의 눈물] 

어릴 적 작은 초가집에서 7식구가 살아가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객지(울산)에서 일을 하셔서 떨어져 살았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까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나 아버지에 대한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지내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홀시어머니와 4남매를 책임지셔야 했습니다. 그 고단함과 중압감, 책임감으로 밤낮없이 일하시고, 늘 눈물로 젊은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자기 전에 항상 어머니는 4남매를 앞에 놓고 여러 얘기를 하시곤 하였죠. 특히, 객지에서 고생하시는 아버지 말씀을 하시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4남매는 일찍 철이 들었고, 각자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척척........ 나름 효자라는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받았고, 논산 군수님 ‘착한 어린이상’ 수상도 하였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 눈물로 보내신 그 세월을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가난이 준 선물] 

학교에서 필요한 학용품을 비롯한 각종 참고서(그때는 ‘전과’)를 사본 적도 없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 과자 한 봉지 사먹을 용돈도 없이 자랐어요. 왜 그렇게 궁색하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께 사달라고 하면 될텐데...... 다른 부모들과 달리 내 부모님의 지갑에는 항상 몇 백원, 몇 천원이 고작인 비어 있었던 탓으로, 알아서 자급자족(?)해야 했음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미안한 생각이지만, 친구 중에 잘 사는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연필도 크레파스도 도화지도 ........때로는 우유 한모금도’ 잘 얻어 썼어요. 그래도 공부는 잘해서 상을 많이 받아 어느 정도 학용품은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어린 나이지만 가난이 무엇인지, 가난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내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내 상황을 비관하지 않았어요. 내 부모님께서 누구보다 성실하시고, 정직하시고, 모범적인 분들이었기에 그런 부모님으로부터 보고 배운 것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나의 모든 인생을 지배할 인생목표와 철학이 수립된 듯해요. 이것이 어릴 적 내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게 된 ‘가난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인 듯합니다. 그 시절 저는 사관학교 진학, 멋진 장교, 대통령을 꿈꾸게 되었고요...

 

중고 시절 이야기도 한둘 들려주세요~~

 

[내 용돈은 내가] 

가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초5학년부터 지게질을 시작으로 산으로 나무를 해 나르고, 딸기 농사를 비롯한 많은 일을 하면서 논일 밭일을 하다 보니, 다른 친구들보다 일을 잘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동네에서도 바쁜 농사철이 되면 가끔 하루 일꾼으로 품삯을 받으며 용돈을 벌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나이에 저는 동네 어른들 따라 동일 품삯 받으며 일을 나가기도 했죠. 일 잘하기로 소문난 효자 아들이라는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또한, 초등학교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선물받은 토끼를 키우면서 저의 새로운 용돈벌이가 시작되었답니다. 2마리로 시작된 토끼가 많을 때는 20여 마리까지 늘었죠. 다 자란 토끼를 팔아서 용돈을 마련하였고, 그 돈으로 참고서도 사고, 군것질도 하고, 저축도 했습니다. 토끼는 중3까지 키웠고, 이후부터는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어 ‘나의 모든 재산’을 동생에게 상속해 주었답니다. 

 

[인생1막: 나의 찬란한 꿈=사관생도] 

집안 형편으로 공부를 잘했던 형과 누나는 전문대학 장학생으로 진학해야만 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꿈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대학진학은 형편상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관학교 사관생도의 꿈(가장 간절했던 꿈), 멋진 장교가 되는 꿈을 키웠죠. 가정형편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가난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대학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방법이 사관학교 진학으로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공업고등학교 진학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나, “나의 찬란한 꿈”을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었고, 이뤄보고 싶었습니다. 중고시절은 온통 사관학교 사관생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동경하면서 보냈던 것 같네요.

 

고3때 학교와 전공을 정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공학과 들어가는 데 성공했는지 여/부 포함해서요.

 

[나의 찬란한 꿈 좌절] 

고3때 KF-16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공군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수를 결정하고, 매일 막노동하면서 학원비, 자취방비,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사관학교에 진학하고자 노력하였죠. 그러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하여 두 번 좌절하고 나서, 큰 산이 무너진 것 같은 허탈함과 아무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며칠을 울면서 보냈습니다. 내게는 찬란한 꿈이 무너진 이때 2년이 가장 큰 삶의 시련이었고, 가장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네요.

[인생2막: 새로운 길을 찾아서=ROTC 학사장교]

두 번의 사관학교 진학이 좌절되고 삶이 목표와 열정이 모두 사라지더군요. 군대 입대를 고민하던 중, 서울에서 삼성전자에 다니던 형이 내려와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ROTC 학사장교였습니다. 멋진 사관생도는 아니지만, 멋진 장교는 될 수 있겠다 싶더군요. 학력고사 응시 두 달을 남기고 일반대학 진학으로 새로운 목표를 향해서 ‘전자공학 전공’을 선택하여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 해병대 입대하고 휴가 나와서     ©

 

▲ 야학교 학생들과 함께 학예회     ©

 

▲ 아내와 딸_내 보물 1호, 2호)     ©

 

대학~대학원에서의 전공과, 공부를 계속하게 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군생활, 결혼 등과 맞물렸을 거 같은데, 그런 이야기 포함해서요. 

 

[군입대 및 군생활] 

대학에 입학하여 1학기 마치고 ROTC 지원을 고민했습니다. 내가 너무 세상을 좁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혼돈의 시간을 가졌어요. 군입대를 마음먹고 ‘대한민국 해병대 696기’로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였습니다. 훈련소 6주 생활은 내가 살면서 가장 혹독한 시간이었으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포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럭저럭 해병대 생활을 하면서 많은 생각과 많은 준비를 하고 새로운 각오로 전역을 하였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전역하고 복학해서 새로운 목표와 진로/취업을 고민하던 중,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적 성공만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고민하던 중, 어려운 환경조건 때문에 학업의 기회를 놓친 많은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야학교 교사활동을 2년간 교사로 봉사하였습니다. 사연도 많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처럼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이었어요. 그들을 보면서 학생들이 새로운 희망과 목표설정, 새로운 삶 개척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선생님의 중요성과 가치를 새롭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의 평생 반려자를 만나다]

2년 동안 야학교 교사 활동을 하던 중, 은행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게 되면서 운명 같은 만남이 이루어졌죠!^ 열심히 학생들 가르치면서 우리의 사랑도 키워 갔답니다요^ 

 

[인생3막: 새로운 나의 꿈=대학교수] 

야학교 교사활동하면서 아내는 나의 천부적 재능으로 가르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면서 “대학 교수”가 되면 좋겠다고 늘 응원해 주었더군요. 그 바람에 나도 모르는 능력을 아내로부터 알게 되었던 거죠. 대학졸업 후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연구논문이 메인 방송사 프로그램에 출연기회가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 관련연구분야 교수님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어 박사진학 및 공동연구를 제안받게 되면서, “아! 하면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고, 관련연구 분야의 개척자가 되고자 대학교수를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관련연구 분야가 생소한 분야이고, 체계화되지 않은 매우 도전적 시도의 학문분야였어요. 때문에 국내에서는 독보적 가치를 갖게 될 수 있음을 확신하여, 이 분야의 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였답니다. 학위과정 중에 결혼을 하였고, 첫째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학비, 생활비, 육아비는 모두 아내의 몫이었고, 저는 그런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 학업에만 정진하였고요.... 

 

교수의 길로 목표를 정한 이유, 그리고 그 관문을 뚫기 위하여 걸었던 과정이 힘들었을 거 같은데요?

 

박사 졸업 후 대학교수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여러 대학에 지원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의료기기 기업을 창업하여 1년 정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내 전공분야와 일치하는 모집공고가 떴길래 지원하였고, 2005년도 연세대학교 의공학과에 임용이 된 상황입니다. 

 

[의식의 확장과 대전환] 

대학시절 야학교 교사활동 2년을 보내면서 “배움의 열정과 가르침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게 되었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바로 “교육”임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저의 인생의 대전환점(turning point)으로 좁은 의식의 세계에서 좀더 크고 넓은 의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시기였습니다. 교육적 철학을 기반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육자가 되고자 교수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행복한 고통] 

우리가 살면서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더군요. 노력과 희생 없이 좋은 결과를 얻는 것도 어렵고요. 문제는 <목표와 성공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와 <그것을 얼마나 행복한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듯합니다. 남들이 가는 길보다 더 험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하면서도 그 힘들고 고된 시간을 즐겼던 것 같아요. 아무도 느껴보지 못한 수고로움에 대한 보답으로 강력한 마약과 같은 희열을 느끼고, 고난과 고통이 희망과 행복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일일이 거론할 수 없지만, 열심히 성실히 담담히 걸어왔던 것 같네요~

 

▲ 국제 학술발표회 _(연구개발 결과 발표 : 관련연구분야 결과 발표 및 연구동향 교류)_국제학회: Young Scientist Award 2009 수상 (관련연구분야 젊은과학자 상 수상)     ©

 

▲ 기술컨설팅(산학협력)_관련기술 및 노하우 컨설팅     ©

 

▲ 연구활동_기업과 공동연구개발한 의료기기 설명회 및 전시회(독일 국제의료기기 전시회)     ©

 

▲ 학생과의 세미나_강의 내용을 숙지하고, 팀별로 강의내용 발표 및 세미나 경연대회     ©

 

현재 연세대학교에서는 어떤 과목을 가르치며, 학교에서의 보직, 대내외적인 활동도 궁금합니다.

 

연세대학교 의공학부 학부생, 대학원생(석박사 과정) 인력양성을 위해서 노력중입니다. 제가 대학원과정 지도 분야는 “의료전자기시스템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기 혹은 자기장을 이용한 항암, 항염, 통증 등을 치료하는 치료기기 연구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학부에서는 의료기기 연구개발에 필요한 기초과목(전자회로, 디지털시스템, 의료전자시스템, 의료용 컴퓨터 등)을 강의하고 있고요.

저는 연구개발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만나 저의 개똥철학을 얘기하는 것을 즐긴답니다. 열정으로 진심으로 즐기면서 강의를 해서 그런지, 대학에서 “강의 우수교수”로 두 번 선정되었어요. 학교에서의 보직으로는 이전에 학부생 현장실습교육 센터장을 했고, 대외적으로는 정부산하 의료기기 산업 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활동중입니다. 

 

자녀들 교육은 남부럽잖게 했을 거 같은데요, 어떻게 해오고 있는지요?

 

부끄럽게도 딸 2명에 좋은 교육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부 잘 하는 딸보다는 싸가지 있는 딸로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죠. 그건 나름 잘 자라주고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싶습니다. 나의 욕심으로 강요하기보다, 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노력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노력을 할 뿐입니다. “수학은 포기해도 인생은 포기하지 말라”는 말로 딸들이 열심히 실천하는 삶을 살아주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남의 자식을 교육하면서 내 자식은 교육이 아니라, 훈계가 되고, 잔소리가 되는 것은... 저만 그런가요? ㅎㅎ

 

지방출신으로서 지방학교 다니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있을 거 같은데요?

 

지금은 글로벌 시대이잖아요? 지구촌 어디든 갈 수 있고, 이미 무한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내가 지방대학생이든 수도권대학생이든 하버드생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경계가 무색해졌고, 누구나 정보와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다만, 무한한 기회를 기회로 인식하지 못하는 아둔함이 있을 뿐이죠.

지역적 한계, 공간적 한계로 인하여 무엇을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패배이며, 자신에 대한 가장 잔인한 학대라고 봐요. 본인들이 지방대학생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대생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위험한 생각이지 않을까요? 세계 유수한 대학들도 알고 보면 지방에 많이 있습니다. 공간적 의식과 시간적 의식을 확장해 보세요. 위대함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의식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후배에게 드리고 싶은 키워드는 “‘근본을 바로 세워야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본립도생(本立道生)”입니다. “융합적 사고 능력을 함양하라”는 말도 첨언하고 싶네요.  

 

 

 

 

엄중한 충언 같네요..... 길어졌는데, 향후 고향을 위하여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거나, 고향분들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추후 기회가 된다면, 논산 지역사회를 위해서 저를 불러주시면 언제든지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논산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전국단위 “건강힐링도시”를 추진해보고 싶습니다. 단순히 고령인 대상의 요양병원 수준을 넘어 좀더 역동적인 건강, 힐링, 웰니스, 자연환경, 관광, 지역특산물(딸기) 등의 모든 인프라를 활용하여 전국단위의 건강도시 메카로 만들어 보고 싶어서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논산 시장 출마 공약 같네요^

또한, 고향을 발전을 위한 다각적 시도로서 산업체 및 하드웨어적 인프라보다 문화적, 소프트웨어적 인프라 사업 육성. 이를 위한 교육인프라 구축으로 행복한 논산시가 될 수 있기를, 함께 공유해 보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대담]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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